노을처럼 여울지다
남자와 단둘이, 그것도 별로 친근하지 않은 서름한 사이의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음식을 먹는다는 건 낯가림이 심한 내게 예삿일은 아니었다. 쫄깃해야 할 면발이 마치 고무줄처럼 질기게 씹혔다. 이럴 땐 묵묵히 먹는 것에만 열중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음식을 씹던 입으로 ..
17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3,560
노을처럼 여울지다
- 혜주씬 염세주의를 동경하세요? 느닷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내 눈을 관통이라도 할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무슨...?- 도서관에 있는 책들이 그런 종류길래요.- 아, 꼭 그런 건 아니에요.- 혜주 씨가 쇼펜하우어..
16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3,640
노을처럼 여울지다
집들이 후로 부쩍 친근한 척 다가오는 璡 때문에 난감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는 등하교 길의 동행도 자신이 날 위해 의당 베풀어야하는 도리나 권리쯤으로 여기는지 璡은 어디서건 나를 기다렸다 불쑥불쑥 나타났다. 몇 번 싫은 내색을 보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가는..
15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2,778
노을처럼 여울지다
璡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보면서 마음이 울컥했다. 몇 날 며칠 동안 pipeline을 독학으로 연습해서 나와 언니 앞에서 제대로 된 연주를 해 보이던 오빠의 우쭐대던 얼굴이 떠올라서다. 그날 오빠의 왼손가락들에 감싸져 있던 살색 밴드가 얼마나 안쓰러웠던지 눈물을 찔끔하는..
14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2,661
노을처럼 여울지다
璡은 손님 접대를 위해 바쁘게 방과 거실을 드나들었다. 거실 건너편에 있는 박선배네 부엌과 냉장고를 같이 사용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부산을 떨어도 안방 쪽에서 인기척이 없는 걸로 보아 아마 박선배와 아주머니는 주말마다 다니는 농장에 가신 모양이었다. 璡은 부산하게 왔..
13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2,476
노을처럼 여울지다
그날은 오전 내 울적한 마음으로 도서관에 박혀있었다. 세 시간의 강의를 빼먹어가면서 점심도 굶은 채 윤희에게 긴 답장을 쓰고 또 오후 강의를 듣고 다시 도서관으로 그렇게 다람쥐처럼 오가면서도 내 주변의 무언가가 달라져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다. 마지막 시간 수업을..
12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2,527
노을처럼 여울지다
이틀간 술병으로 드러눕다가 겨우 삼일 째 되는 날 기운을 차렸다.체육대회가 금요일이었으니 이미 일요일 아침이었다. 아직도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속이 쓰렸다.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활짝 열고 마당쪽으로 나있는 창틀에 걸터앉았다. 마당 가운데 활짝 핀 목련이 봄바람에 이..
11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2,490
노을처럼 여울지다
본관으로 향하는 입구 양 옆으로 연분홍 꽃이 무더기로 만개했다. 그 향이 얼마나 진하던지 바람이 지나가는 교정 안 구석구석까지 향기가 흩날렸다. 그것이 라일락꽃이라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이름만 알고 있을 때는 왠지 잔잔한 꽃무늬 원피스를 연상하게 되는 꽃이었다. 그..
10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2,498
노을처럼 여울지다
璡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璡의 방문에 당황하여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특유의 입술을 샐쭉이며 웃는 璡의 표정은 쑥스러움으로 가득했다. - 토요일마다 도서관에 가면 혜주씨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해서요. 璡은 묻지도 않은 말에 스스로 대답을 하면..
9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2,340
노을처럼 여울지다
강의가 다 끝나고도 한참을 빈 강의실에 앉아있었다.여느 때 같으면 누가 붙잡을세라 벌써 도서관으로 휭 하니 들어갔을 텐데왠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창문 난간에 쌓아둔 책 때문에라도 어차피 한번은 가봐야 할 텐데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이럴까 저럴까 망설임 끝에 결..
8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2,416
노을처럼 여울지다
그 날 이후로 며칠 째 교련복은 보이지 않았다.나는 더 이상의 갈등을 접고 이제는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해보기로 했다.얼결에 내 자리가 되어버린 창가의 아지트에 나도 남들처럼 성을 쌓기 시작했다.국, 영, 수, 국사,,,등의 교재들과 머리 식힐 때 읽을 만한 소설책 몇 ..
7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2,499
노을처럼 여울지다
평소 박선배의 집에서 우리집까지는 택시로 40여 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는데폭설이 내린 오늘은 아마 두 세배는 족히 걸릴 듯 했다.뿌연 습기로 뒤덮였던 璡의 안경알이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맑아지고 있었다.핸드백 속의 휴지를 꺼내줄까 하다 필요 없는 친절이 될 거 같아 못본 ..
6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2,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