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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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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8-17


이틀간 술병으로 드러눕다가 겨우 삼일 째 되는 날 기운을 차렸다.
체육대회가 금요일이었으니 이미 일요일 아침이었다.
아직도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속이 쓰렸다.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활짝 열고 마당쪽으로 나있는 창틀에 걸터앉았다.
마당 가운데 활짝 핀 목련이 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현기증이 났다.
어지럼증을 덜어보려고 시선을 좀 더 먼 앞산 쪽으로 옮겨보았다.
한결 편안했다.
 
그때 박선배가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찾아왔다.
 
- 뭐 좀 먹어야 기운이 나지. 이거는 방금 울 엄마가 끓인 녹두죽이고 이건 우리 농장에서 새벽에 따온 딸기야. 먹어봐. 
 
선배는 잘 익은 딸기 하나를 집어 꼭지를 떼어내더니 억지로 내 입안에 밀어 넣었다. 달콤한 맛과 향이 입안 가득 전해졌다.
선배도 굵은 딸기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선배는 선홍빛 딸기 즙이 입술 가에 배어나는 채로 말을 이었다.
 
- 어제 진이가 찾아 왔었다. 너 많이 걱정하는 눈치던데 니가 계속 누워만 있어서 그냥 돌아가라고 보냈어.
 
박선배는 가져온 딸기 절반 가량을 자기가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입술을 오물거리며 나를 탐색하려 들었다.
 
- 니들 둘이 분명 아는 사이였던 거 같은데......
 
나는 선배의 궁금해하는 눈빛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璡과의 만남을 대충 이실직고 하고 말았다.
그날 내 기억이 적절한 대목에서 끊긴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만일 그의 등에 업혔던 모든 상황을 기억한다면 얼마나 창피했을까.
그 껑충한 등판이나 기다란 팔의 촉감을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다음 날, 월요일의 첫 시간은 강의가 없었으므로 나는 느긋하게 학교로 향했다.
교문에서 부터 라일락 향기가 바람에 실려오고 있었다.
범죄를 저지르고는 그 현장을 다시 확인해보는 범인 같은 심정으로
지난 주에 내가 실례를 범했던 그 꽃가지 곁을 지나면서 흘깃 곁눈질로 주변을 훑어 보았다.
다행히 무성한 꽃 때문에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본관을 지나 학과실 쪽으로 갔다.
예상대로 학과 우편함에 두 통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아침마다 학원을 가는 발걸음이 왜 이리 무거운지 머리속에 들어가야 할 공부는
채워지지가 않고 자꾸만 잡념이 산더미처럼 쌓여간다.
이래갖고 우리 당당하게 만날 그날을 맞이할 수나 있을런지......
니가 보고싶어서 당장이라도 터미널로 달려가고 싶기도 하고......
너와 함께 거닐던 동숭동길에서 혼자 멍하니 앉아있어도 보고......
우리의 지독한 숙원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는 죽어도 견디리라는 각오 하나로
오늘도 버티고 또 버틴다. 사랑해. 혜주야.
 
여고때 단짝이었던 윤희의 편지를 읽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나야말로 당장 터미널로 달려가 그애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토록 염원하던 H미대를 낙방하고 함께 부둥켜 안고 울던 그애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려 마음이 미칠것만 같았다.

윤희는 선천성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살짝 저는 미대지망생이었다.
어려서부터 성장기에 맞춰 몇번 수술을 받아 그나마 많이 좋아진 상태지만
그래서인지 치마를 입기 싫어했고 항상 바지를 입고 다녔다.
여고 1학년때 같은 반이 되었는데 운 좋게도 3년 내내 같은 반이 되었다.
주말이면 근교로 버스를 타고 나가 스케치를 다니면서 늘 함께 시간을 보냈다.
윤희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시를 쓰곤 했다.
윤희는 스케치를 나갈때마다 항상 은색 소형 카세트를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중학생시절부터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미술협회장 상을 휩쓸었던 미대 지망생답게
Don Mclean의 빈센트를 좋아했다.
빈센트는 Don Mclean 가수가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어 고흐를 추모하며 만든 노래인데
우리는 starry~ starry~ night ~으로 시작되는 부분을 항상 쏘리~쏘리~나잍~ 하고 부르면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까르르 웃곤했다.
하얀 피부에 동그란 콧망울이 귀여웠던 윤희가 금방이라도 달려와줄 것만 같았다.
 
콧물을 훌쩍이며 또 다른 편지를 뜯었다.
발신인도 적혀있지 않은 편지는 필체만으로도 주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미 몇 번인가 받아 본 글씨체였으므로.
두 장 가득히 써내려간 편지 내용 중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그 부분만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내 등에 혜주씨를 업히던 그 순간에 난 알았습니다. 우린 운명이라는 것을......
 
난 운명따위는 믿지 않아.
편지를 도로 접어 가방에 넣고 도서관으로 향하면서도 내내 콧물이 훌쩍여졌다.
윤희의 편지로 인해 일순간 마음이 휑하니 비어버렸다.
도서관 계단 옆에 며칠 사이 만개한 개나리 틈에서 푸른 잎들이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있었다.
나는 뛰다시피 계단을 올라 얼른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