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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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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8-25

남자와 단둘이그것도 별로 친근하지 않은 서름한 사이의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음식을 먹는다는 건 낯가림이 심한 내게 예삿일은 아니었다
쫄깃해야 할 면발이 마치 고무줄처럼 질기게 씹혔다
이럴 땐 묵묵히 먹는 것에만 열중해야 하는 건지아니면 음식을 씹던 입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건지 참 난감한 순간이었다
 
가위질을 한다고 했는데 골고루 되지 않았는지 긴 면발이 섞여 있어서 토끼처럼 앞니로 살짝살짝 면발을 끊어가며 먹는 것도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수저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에도 민감해지고 
더구나 목구멍으로 음식물이 넘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긴장된 순간에 
하필이면 면발을 끊던 윗니와 아랫니의 저작이 빗나가 뿌득뿌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김영규는 잠자코 내 앞에 놓인 냉면 그릇을 덥석 들어 자기 앞에다 놓더니 가위로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골고루 가위질을 하고는 도로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양념이 묻은 가위를 마시던 물 잔에 담가 휘휘 저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의 행동을 보고만 있었다
그는 다시 탁자 한쪽에 놓여있는 올록볼록한 냅킨을 툭툭 몇 장 뽑아 가위를 슥슥 문질러 닦았다
이 사람 결벽증이 있나생각을 하는 순간그는 말끔해진 가위로 깍두기를 숭덩숭덩 자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틀니를 해줘야겠군.
 
그는 혼잣말인지 일부러 들으라는 소린지 모르게 중얼거리면서 다른 반찬들도 먹기 좋을 만큼 적당히 잘라놓고는 다시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지나친 친절과 천연덕스러움에 어이없어하며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틀니를 해준다는 말이 우스워서 쿡쿡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지만 말고 면발 불기 전에 얼른 마저 먹어요.
 
뭐든 자기 의지대로 해버리는 이 남자
자기 할 말만 내뱉고는 얼굴도 쳐다보지 않으면서 거무죽죽한 면발을 소스에 담가 천연스레 먹는 것이 나를 배려함인지 스스로도 쑥스러워 일부러 시선을 피하려함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어느새 그의 명령대로 다시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부스 앞에 말끔히 단장한 내 구두가 주인을 기다리며 얌전히 놓여있었다
벙어리 수선공은 부스 처마 끝에 매달린 알전구 두 개에 의지한 채로 영업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구두코에 비친 전구 알이 자그만 보름달 두 개가 내려앉아 있는 듯했다
구두를 갈아 신고 사뿐히 걸음을 내디뎌보았다
달라진 키높이에 왠지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한쪽 발을 어색하게 내딛으며 걸어왔던 길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걸어나갔다.
마음속으로 김영규, 고마워요, 하는 생각을 하면서.
 
불빛의 세계를 벗어나니 시커먼 하늘이 건물들과 맞닿을 것처럼 낮게 내려와 있었다
큰 길 건너에 보이는 교문 양옆으로 출입문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육중한 대리석 기둥 두 개가 마치 컴컴한 하늘을 송두리째 떠받치는 형상으로 우뚝 서있었다
 
우리는 그 파수꾼을 향해 길을 건넜다
나는 횡단보도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그어진 빗금을 하나하나 밟으며 또 습관처럼 빗금의 개수를 셌다
빗금의 간격이 넓어서 평소 나의 보폭보다 훨씬 넓게 다리를 벌려야 했다
그는 가끔씩 중심을 잃고 상체를 기우뚱대는 내 옆을 당당히 보폭을 맞추며 안정적인 걸음으로 걸었다
 
마지막 빗금을 한 발로 밟고 다른 한 발을 인도 위에 막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가 내 팔을 낚아채듯 붙잡으며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 순간 내 앞으로 자전거 하나가 휙 지나갔다
경사진 교문으로부터 굴러 나온 자전거는 아슬아슬하게 우리 앞을 비켜 지나갔다
 
조심성도 없고...... 어느 쪽이에요?
 
나는 놀란 데다가 밑도 끝도 없는 그의 질문에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혜주씨 집이 어느 쪽이냐구요.
 
오늘 일진이 사나운 날인가?
낮에 학교에서부터 넘어질 뻔하더니 오늘따라 하필이면 김영규 앞에서 허둥대는 내 꼴이 한심했다
나는 교문 왼쪽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그가 왼쪽으로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혼자 가도 되는데요
자전거 하나도 못 피하는데 혼자 갈 수 있겠어요? 길을 걸으면 좌우를 잘 살피면서 가야지 왜 자꾸 바닥을 보고 다녀요?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이라도 줍게?
 
그는 내가 사는 곳을 알고 있는 것처럼 앞장서 걸었고 나는 마치 그의 행선지에 동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만히 따라 걸었다
교문에서 일직선으로 걷다 우측으로 살짝 꺾어지는 길목부터는 내가 앞장을 섰다
관공서를 중심으로 번화한 상가가 밀집해있는 환락의 거리를 지나면 아직 개발되지 않은누군가가 군데군데 정성스레 채소밭을 일구어놓은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 공터 뒤쪽이 내가 사는 주택가였다
공터와 경계를 이루는 호젓한 골목 초입에서 작별 인사를 할 양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골목이 너무 어두운데 밤늦게 혼자 다니지 말아요.
그는 내가 제지할 틈도 없이 골목으로 들어섰다
과의 불편한 동행으로 인해 처음의 그 안락하고 정감어린 골목길의 이미지를 잃어버린 이 길을 생각지도 않게 그와 단둘이 걷고 있었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대문들마다 옥외등이 켜있긴 했지만 불빛이 너무 희미해서 겨우 그곳에 대문이 있다는 표시만 해줄 뿐 골목길을 밝혀주는 역할을 하기에는 미미했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골목은 후덥지근했다
뉘집에선가 늦은 저녁을 먹는지 얼큰한 찌개국물 냄새가 퍼져 나왔다
두사람이 겨우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골목길은 내 팔꿈치가 그의 팔을 닿기도 하고 그의 팔꿈치가 내 팔에 와 닿기도 하는 야릇한 밀착을 선사해주었다
의도치않은 그와의 스킨십이 겸연쩍어 내가 한발쯤 뒤에 서려 하면 어느새 그는 보폭을 좁혀 다시 나와 어깨를 나란히 맞추었다
그렇게 좁은 길을 나란히 걷던 순간이었다
담벼락에 늘어진 넝쿨장미가 시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내 머리카락을 휙 낚아챘다
내 고개는 뒤를 돌아보는 모습으로 저절로 돌아가 멈췄고 놀란 내 입에서 아하는 외마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급작스런 상황에 그도 놀랐는지 걸음을 멈추고 내 상태를 살폈다
그는 장미 가시에 걸린 내 머리칼을 한올한올 조심스레 뽑아냈다
땀에 젖은 그의 체취가 장미꽃 향과 섞여 야릇한 냄새를 풍겼다.
일진이 사나운 건지아님 좋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으나 오늘의 상황들이 싫진 않았다.
 
- 다행히 가시에 찔리진 않았네요.
조심성이 없다고 한소리쯤 할 줄 알았는데 그는 나를 장미가 없는 쪽으로 옮겨 걷게 했다
 
골목 끝에 이르자 환하게 불 켜진 박선배네 거실과 의 방이 담장 너머로 건너다 보였다
그곳에서부터 열 댓 걸음쯤 걸어 모퉁이를 돌면 바로 우리 집 대문 앞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의 모습이 얼핏 보여 얼른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담벼락보다 살짝 들어간 대문 양쪽 벽에 등을 기대고 마주 섰다
이제 그만 작별인사를 하고 들어가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왠지 김영규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외등이 켜지지 않은 대문 앞은 칠흙같이 어두워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머리 하나쯤만큼 더 큰 시커먼 형체만 내 앞에 벽을 기댄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