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박선배의 집에서 우리집까지는 택시로 40여 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는데
폭설이 내린 오늘은 아마 두 세배는 족히 걸릴 듯 했다.
뿌연 습기로 뒤덮였던 璡의 안경알이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맑아지고 있었다.
핸드백 속의 휴지를 꺼내줄까 하다 필요 없는 친절이 될 거 같아 못본 척 일부러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민들레 홀씨 같은 눈송이들이 차창에 날아 들어 두텁게 쌓이면서 점점 유리의 빈 공간에 눈덩이를 증식해가고 있었다.
璡은 차에 타고 난 후 한참을 말이 없었다.
작은 공간 안에서 아무런 대화도 없이 앉아 있는 시간이 여간 거북스러웠다.
과연 우리가 한때 뜨거운 사랑을 나눈 사람들이었던가 의문이 생길만큼 어색하고 불편한 순간이었다.
행선지만 툭 내던지고 도무지 말이 없는 남녀 손님을 태운 택시가 U턴을 하더니 한시간 전에 내가 하릴없이 간판 이름만 읽어대던 그 건물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이미 잠들어 버린 건물 외벽에 간판 불빛들만이 대낮처럼 깨어 대설주의보가 내린 이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
- 그땐 내가 너무 철이 없었어.
긴 침묵을 깨면서 갑자기 璡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내 왼 손을 잡았다.
순간 나는 얼른 손을 빼냈다. 璡이 내 손을 다시 잡았다. 나도 기어이 손을 다시 빼내 핸드백 손잡이를 꼭 감싸쥐었다.
이 상황에 스킨십이라니.
璡의 몸과 닿는 자체가 싫었고 그의 꽁꽁 언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얼음장같은 차가움이
내 온 세포에까지 전달해지는 듯한 느낌도 싫었다.
- 고집은 여전하군.
반백의 택시기사가 백밀러를 통해 우리 둘을 훔쳐보며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뒷자리에서 사랑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른다.
-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을 제대로 몰랐던 것 같아.
그래서 살면서 내내 혜주한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어. 언젠가 만나면 꼭 용서를 빌어야지 마음 먹고 있었는데... 혜주한테 용서를 못받아선지 난 지금 천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아. 내 모습 보면 나 사는 모양새가 짐작이 되지?
璡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귓가에 덩어리째 웅웅대는 것 같더니 마지막 물음표가 정확히 내 뇌리에 꽂혔다.
아까 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 목구멍까지 기어 나오는걸 참고 참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 지금 뭐하면서 지내?
다섯 시간을 璡과 함께 보내면서 처음으로 해보는 질문이었다.
무언가를 상대에게 묻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되도록 관심을 유도하는 궁금증 따위를 갖지 않으려 애썼는데 부질없는 질문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 부질없는 질문 속에는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직업은 무엇이고 결혼생활은 어떤지 부인과 아이들 그리고 부모님 안부까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궁금증이 담겨있었다.
- 나 그냥 집에 있어.
그냥 집에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백수가 되어 놀고 있다는 건지 아님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경제활동을 할 수 없을 만큼의 지병이 있는 건지 도무지 짐작을 할 수는 없지만 그냥이라는 부사를 붙이는 걸로 보아 璡의 생활이 보통의 가장과 다르다는 것만은 알 것같았다.
- 집에서 뭐 하는데... ?
- 그냥 빈둥빈둥...
- 그럼 생활은 어떻게... 부인이... ?
- 우리 집사람.... 흐, 그 사람은 나만 바라보면서 살아. 수중에 십만원이 있으면 십만원 쓰고 백만원이 있으면 백만원 쓰면서, 내일이라는 개념이 없는 사람이지. 세상 물정을 몰라. 좋게 말하면 너무 순수한 사람이고.
璡만 바라보며 산다는,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한 그 부인의 모습이 언뜻 떠오르는 것 같다 이내 사라졌다.
- 그때 혜주가 결혼한다는 말 듣고 전화했을 때 그 냉랭하던 목소리가 얼마나 내 가슴을 찢어놓았는지 밤새 술을 퍼마시고 뻗어버렸었어. 그날 밤 보름달이 어찌나 환하던지 하마터면 술김에 혜주 집까지 쫒아갈 뻔 했지. 맨 정신으로는 갈 용기도 없고 참 못난 놈이었어. 못난 놈이라서 혜주를 놓쳤겠지만.
璡의 회한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내 마음은 그저 눈쌓인 바깥의 기온처럼 냉랭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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璡과의 첫 미팅 후로 내 생활은 여느 때처럼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매일 대 여섯 시간의 강의를 듣고 또 도서관 계단 수를 세면서 오르내리고 늘 정해진 자리에 앉아 고교과정의 수험서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재수를 준비하는 내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기 싫었다. 그래서 도서관 가장 안쪽 창가에 구석자리를 정해놓고 은둔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내 주변으로는 다양한 은둔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 곳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재수준비나 혹은 취업준비를 위해 몰두 할 수 있는 우리들만의 공간이었다.
그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은둔자들은 온갖 책을 잔뜩 가져다가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성을 쌓아놓고 있었다.
손때가 덕지덕지 묻은 두꺼운 법전부터 수학 정석이나 성문종합영어 같은 서적들이 책상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어 안전하고도 은밀하게 시야를 충분히 가려주었다.
입학 후 처음으로 도서관에 들어 왔을 때 내 자리에는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옆에 있는 책상처럼 책으로 높은 담이 쌓여있지 않아 찾아 온 자리였는데
막상 와서 보니 대학영어와 경제원론 교재가 가지런히 포개져있었다. 슬쩍 겉표지를 보니 김영규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자리에 턱을 괴고 앉아 한참 동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는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아니었다. 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덜컥 입학을 하긴 했지만 과연 내가 이 학교에서 졸업을 할 수가 있을까?
비싼 등록금을 내고 몸만 왔다 갔다 하면서 재도전을 위한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로 골똘해 있을 때 누군가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얼룩덜룩한 교련복을 입은 남학생이었다.
내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려 하자 그는 내 어깨 위로 성큼 팔을 뻗어 책상위에 놓인 두 권의 책을 집어 들고는 중앙 통로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갔다.
화가 났나?
잠깐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잠시 머물다 가면 그만인 객인데 뭘, 하며 이내 다시 좀 전의 포즈대로 턱을 괴고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만치 교련복의 그 남학생이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얼룩덜룩한 등짝이 계단을 따라 점점 사라지더니 그의 동그란 뒤통수마저도 순식간에 숨어버렸다.
다음 날도 여전히 강의가 없는 시간에 마땅히 갈 곳이 없던 나는 도서관을 찾았다.
중앙통로 입구에 서서 양쪽을 눈으로 훑어보니 군데군데 빈자리는 많았다.
그러나 내가 퍼지르듯 편히 앉을만한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뒤꿈치부터 조심조심 내딛으며 안쪽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어제 교련복 자리가 다행이 비어있었다.
오십분을 쉬었다가기엔 딱 좋은 자리인데 혹시 그가 또 말없이 다가와서
슥 책만 빼내 가지나 않을까 싶어 조바심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