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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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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8-13

璡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璡의 방문에 당황하여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특유의 입술을 샐쭉이며 웃는 璡의 표정은 쑥스러움으로 가득했다. 
 
- 토요일마다 도서관에 가면 혜주씨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해서요.
 
璡은 묻지도 않은 말에 스스로 대답을 하면서 비어있는 옆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 안 그래도 막 나가려는 참이었는데...
 
나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얼른 가방을 집어 들었다. 
누가 보면 도서관 구석자리에서 둘이 은밀한 대화라도 나누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고 
옆자리 학구파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기에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가는 동안 璡은 두 칸씩 성큼 내려갔다. 
2백90은 훨씬 넘을 듯한 璡의 구두를 흘깃 훔쳐보며 내려가는데 낯익은 교련복이 시야에 들어왔다.
계단 몇 칸 아래쯤에서 올려다보는 그의 눈과 잠시 마주치면서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엇갈려 지나갈 때까지 찬찬히 시선을 마주쳤다. 
불과 몇 초 사이였지만 교련복의 눈동자가 연한 갈색이며 한쪽 눈에 짙은 쌍커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불러 세워 고맙다는 말이라도 할까 하다 벌써 계단을 다 내려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璡에게로 향했다.
 
璡은 도서관 뒤편에 네 개의 나무 벤치가 놓여있는 한적한 소나무 숲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 학교 안에 이런 호젓한 장소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런데 내가 왜 이 사람을 따라 온거지? 하며 정신을 차리는 순간 璡이 입을 열었다.
 
- 지난 번 미팅후로 몇 번 찾아가려다가 캠퍼스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를 기대하고 참았는데 
학부가 달라서인지 혜주씨를 볼 기회가 없었네요. 순길씨 편에 전해 들으니 혜주씨가 도서관에 아지트를 틀었다고 해서 한번 가봤습니다.
 
몇 번인가 순길을 통해 내 정보를 얻어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순길 또한 내 성격을 알 만큼 아는지라 목마른 자 스스로 샘을 파도록 내버려 두는 눈치였다. 
그날의 미팅 이후로 순길 무리들은 나를 자기들 무리에 합류시키려고 부쩍 친근한 척하며 다가왔다. 그럴수록 나는 더 도서관 깊숙이 파묻히려 했다. 
璡이 캠퍼스 내에서 나와 마주칠 기회를 얻지 못한 것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한 내 행동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이런 말하기 쑥스럽지만 혜주씨랑 좋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璡의 갑작스런 대시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 친구라는 단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어딘가에 남겨두고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아 
찾지 못하는 소중하고 애틋한 존재라는 것쯤으로 정의해두고 싶은 것이었다. 
 
璡은 한참동안 내 대답을 기다렸다. 
변명이든 무어든 간에 내 의사를 밝혀야 할 순간인데 그럴싸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 내가 부담스러운가요?
 
답답한 듯 璡이 물었다. 나는 네, 조금. 하고 대답을 했다. 
 
- 어떤 점이 부담스러운데요?
 
지금 내가 맞이한 상황은 부담스럽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닌데 璡에게 적절히 설명할 실마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이쯤에서 내 입장을 확실히 대답해 주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 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내 자신과 한 가지 약속을 한 게 있어요. 절대 사사로운 인연을 만들지 말자고...
 
- 왜 굳이 세상을 그렇게 삭막하게 살라고 해요?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다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을 하든가요.
 
- 그 쪽이 아닌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어쩌면 그순간의 내 말투는 충분히 시건방져 보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당신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는 말보다는 나을 성 싶었다. 
그리고 뭐 어쨌든 스타일을 따질 문제도 아니었으므로. 
 
璡의 표정이 굳어진 듯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연거푸 무릎 위에 툭툭 쳐대면서 말이 없었다. 
이러는 나도 답답했다. 
왜 내가 원하지도 않은 난처한 상황에서 곤혹스럽게 앉아있어야 하는지. 
누군가에게 친구가 되니 마니 하는 문제에 부닥뜨려야 한다는 자체가 불편하고 짜증스러웠다.
 
- 그만 일어설게요. 
 
璡은 아마 내 태도에 단단히 화가 난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집으로 갔다. 
그리고 여전히 책장 모서리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마른 꽃다발을 
반으로 구겨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이젠 스스로에게 더 혹독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도 몇 번인가 璡은 내 앞을 우연인지 일부러인지 스치듯 지나가기도 하고 
학과 우편함에 편지를 꽂아 놓기도 했다. 
그날의 감정에 맞춘 시를 골라 써넣거나 장문의 편지 속에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담은 내용들이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재수를 하기에는 주변에 방해요소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드는 날들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언니와 약속하기를
일단 대학 과정을 제대로 흡수해서 수업을 듣든 않든 간에 
출석만큼은 충실하기로 했었으므로 
교육사 시간에 수학정석을 풀더라도 강의실에 얼굴을 디밀어야 했다.
 
4월에 접어들면서 캠퍼스는 따사로운 햇살과 더불어 활기를 더해갔다. 
춘계체육대회에 있을 학과대항 축구 예선 리그전이 매일 운동장에서 열렸다. 
학생들은 자기네 학과가 예선전을 치르는 날이면 
일제히 스탠드에 진을 치고 앉아서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운동장 바로 앞에 위치한 본관에서 수업이 있는 날은 강의에 지장을 줄만큼 함성소리가 뜨거웠다. 
교수님들도 강의를 중단하고 창문너머로 빠꼼이 고개를 내밀어 구경하곤 했다. 
 
- 혜주야 오후에 우리과 예선전 있는거 알지? 응원하러 안오면 곧 죽음이다.
 
순길이 강의실을 나서는 내 등 뒤에다 주먹 감자를 해보이며 압력을 넣었다. 
알았지? 하며 재차 되물음하는 순길을 향해 웃음으로 대답했다.
 
 선수로 출전하지 않은 남학생을 비롯한 우리과 여학생들은 
돌계단 스탠드에 줄지어 앉아 열심히 응원을 했다. 
입학 후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웃통을 벗어 제끼고 운동장을 누비는 선수들과 목청껏 화이팅을 외치는 응원단의 모습을 보면서 살아 숨쉬는 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 속에 자연스레 묻혀 한껏 전율을 느끼고 승부욕을 불태우는 나를 보면서 
스무해를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생동감있게 무언가를 추구해 본 적이 있었던가 
잠시 자문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