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들이 후로 부쩍 친근한 척 다가오는 璡 때문에 난감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는 등하교 길의 동행도 자신이 날 위해 의당 베풀어야하는 도리나 권리쯤으로 여기는지
璡은 어디서건 나를 기다렸다 불쑥불쑥 나타났다.
몇 번 싫은 내색을 보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가는 길이 같다 보니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 과 강의 시간까지 좍 꿰어 나의 이동반경을 감시하는 듯한 璡의 집요함은
내 마음을 더욱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날도 璡은 내가 수업중인 인문대학 강의실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강의실 창문 너머로 璡의 웨이브 머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이 보여
마지막 강의가 끝나자마자 나는 그를 피해 인문대학 건물 옆문으로 빠져나와 서둘러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본관 입구쪽에서
내리쬐는 햇빛 아래 반투명체 같은 희미한 실루엣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실루엣은 점점 하늘색 폴로 T셔츠와 청바지로 바뀌었고
그 청바지가 어느 순간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한자리에 멈춰섰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내 굳은 표정과 바쁜 발걸음을 저만치서부터 보고 있었는지
나만큼이나 굳은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며 서있었다,
교련복 차림이 아닌 김영규의 모습은 낯설었다.
왜 그가 당연히 교련복만 입을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T셔츠 차림이 낯설기도 했지만 밝은 햇살에 투영된 연한 하늘색이 그의 하얀 얼굴빛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규와의 마주침은 좀 전의 긴장된 마음을 놓아버릴 만큼 뜻밖이면서 반가웠다.
뜨거운 태양 아래 바쁜 걸음으로 인해 숨이 차오르던 참이라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노트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햇빛을 가리면서 눈인사를 건넸다.
- 무슨 일 있어요?
처음 들어보는 그의 목소리였다.
음색으로 보면 테너와 바리톤의 중간 정도라 할까.
악기로 표현하자면 마치 튜바의 편안하고 낮은 중저음과 같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음성이었다.
그를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와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리라던 다짐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머릿속은 온통 하얗게 텅 비어버렸다.
지금 내 앞에 그가 마주 서 있다는 것조차 한낮에 잠깐 졸아 꾸는 오몽(午夢)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김영규, 그가 바쁜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나를 걱정하는 마음을 갈색눈동자에 가득 담은 채 나에게 묻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그에게 나의 숨찬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면서
본관 앞 소나무 숲 아래 벤치를 손으로 가리켰다.
소나무 숲으로 향하는 돌계단을 내려서다 아직 가다듬어지지 않은 호흡 때문인지 발걸음이 꼬여 순간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었다.
김영규가 얼른 내 팔을 붙들어 넘어지려는 나를 잡아주었다.
내가 조심조심 돌계단을 마지막까지 내려가는 동안 김영규는 내 팔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서 바다가 연상되는 상큼한 스킨 향이 났다.
이 와중에 그의 향취를 느끼고 있는 나에게 그는 벤치에 흩어져있는 솔잎들을 손바닥으로 쓸어내고는 나를 앉게 했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그를 만나서 마치 허둥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 무슨 일 있어요? 급히 걸어가던데......
그는 재차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 아니요, 그냥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참, 저번에 주신 책 잘 보고 있어요.
- 아, 네에. 새 책을 드려야했는데 보던 걸 드려서......
- 아니에요. 요점 정리를 잘 해두셔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게다가 덤으로 낙서까지 즐거움을 준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겨우 짧은 대답만 하고 말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璡이 아직 강의실 앞에 있을까? 아님 집으로 가는 길 언저리에 있을까?를 잠깐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김영규가 불쑥 말을 꺼냈다.
- 자퇴를 하려고 왔어요.
갑자기 허무해지는, 갑작스레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 기분은 무얼까.
여태 눈에 보이지도 않던, 그렇다고 마음속에 담아둔 것도 아닌 그의 존재가 왜 지금 까닭모를 무게를 실으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던 전선의 한 가닥이 떨어져 나가려는 찰나처럼
단전이 될 듯 말듯 깜박이는 아슬아슬한 이 느낌은 무엇인가.
무언가 아득해지는 순간이었다.
햇살이 시야에서 어지럽게 퍼지는 듯 하더니 그의 머리 위쪽 소나무 가지에서 매미들이 떼창을 시작했다.
시끄러운 매미소리를 쫓아 소나무 가지를 쳐다보다 그의 얼굴에서 시선이 멈췄다.
둥글고 야무진 윤곽의 얼굴이었다.
가끔 눈을 깜박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그의 갈색 동공을 감췄다가 열었다가 하는 것이 신비롭게 보였다.
대화가 멈춰버린 순간의 어색함보다는 대화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쑥스러움이 몇 배는 더한듯했다.
이대로 계속 말없이 앉아있다가는 질식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조금 전의 내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 건지 아직도 뭔가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가 먼저 무슨 말인가 던져주기를 바랬으나 이 상황에서는 내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 나을성싶어 결국 입을 열었다.
- 한동안 안보이던데 서울에 있었어요?
- 아직은 여기에 있어요.
아직, 이라는 말에 긴장했던 호흡이 나직이 새어나왔다.
왜 내가 긴장을 하고 있는 걸까.
어떤 인연 관계도 아닌 그가 아직은 가까이에 머물러있다는 사실에 왜 나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인지.
- 그럼 그 책들은......
- 작년에 서울에서 입시학원을 다녔어요. 두 번째 실패를 하고 여기에 발이 묶여 있었지요. 이 곳에 적을 두고 있어 마음이 해이해진 게 아닌가 싶어 아주 정리하고 떠날라구요.
아주, 라는 부사가 이토록 순식간에 사람의 마음을 삭막하게 만들 줄 몰랐다.
그것은 마치 늘 내 주변 어딘가에 있어 그다지 소중함을 몰랐던 그 무언가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후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고 안타까워하는 그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