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처럼 여울지다
배롱나무 길을 걷다 우측으로 휘어진 곳에 드넓은 과수원이 나타났다. 과수원 정면에서 바라보이는 농막의 왼쪽으로는 푸르딩딩한 풋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나무가 줄을 지어 있고 오른쪽에는 옥수수와 고구마가 심어진 밭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다.일행들은 박선배를 따라 농막을 ..
27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66,542
노을처럼 여울지다
연속되는 초인종 소리에 불안한 마음을 안고 대문을 열었다.대문 앞에는 璡이 서 있었다. 반갑지않은 얼굴을 확인한 순간 도로 대문을 닫을까 잠시 생각했으나 박선배의 울음소리와 璡의 상기된 얼굴빛으로 보아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있어 말없이 눈인사를 했다. - 잠깐 애..
26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64,911
노을처럼 여울지다
璡의 기타 소리는 오전 오후를 가리지 않고 잊을만하면 들려오곤 했다. 어떤 날은 연주회라도 나가는 사람처럼 어느 한 대목을 줄곧 되풀이해댔다. 그럴 때면 온 신경이 기타소리에 쏠려서 막힌 대목이 제대로 풀릴 때까지 다른 아무것도 집중하지 못하고 덩달아 손가락이 근질거릴..
25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65,225
노을처럼 여울지다
이별의 순간을 잊기 위해 애써 딴청을 피우던 시간들이 후딱 달음질쳐 지나가고 한동안 말이 없던 김영규는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내 왼손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힘주어 감싸쥐었다. 꽉 쥔 손아귀에 땀이 차오르고 아무런 말없이 앉아있는 순간에도 수많은 언어들이 공..
24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65,484
노을처럼 여울지다
금구리를 다녀온 다음날 오후까지 시체처럼 누워만 있었다. 갑작스레 모든 것을 놓아버린 해방감이 온몸의 기를 쏙 빼버린 듯 나른했다. 어제 하루 동안의 일들이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아득하게 되살아났다. 허기진 뱃속을 채우려 겨우 일어나 거실로 나갔을 때 탁자위에 내던져진..
23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4,580
노을처럼 여울지다
엇박자로 뛰는 그와 나의 심장소리가 철교 위를 지나는 열차의 마찰음처럼 커지고 있었다. 그의 가슴께에 엉성하게 기댄 채 멈춰버린 동안 나의 목 근육이 점점 굳어가는 듯했다. 살짝 몸을 빼보려 했지만 그의 팔이 억세게 나를 감싸 안았다. 그는 조심스레 흘러가는 말처럼 함..
22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3,622
노을처럼 여울지다
그 후로 璡과는 딱 한번 마주쳤다. 한참 기말고사를 치르느라 캠퍼스 전체가 적막 같던 날, 강의실로 이동하던 길에 스치듯 그와 마주쳤을 때 우리는 서로가 눈길조차 건네지 않았다. 찬 기운이 쌩하게 도는 璡과 내 모습을 보고 순길은 어떤 조짐을 느낀 것 같았다. 함께 걷..
21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3,573
노을처럼 여울지다
밤 내 천둥번개에 놀라 잠을 못 이루고 겨우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어제 김영규가 하나밖에 없는 내 우산을 들고 빗속으로 사라지면서 내일 아침에도 비가 내리면 데리러 오겠노라 하던 말이 귓가에 웅웅 댔었는데 어느새 아침이 되어있었다. 속절없이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환..
20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3,553
노을처럼 여울지다
앞서나간 김영규는 도서관 현관 기둥에 기대어 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와 몇 발자국 떨어져 디귿자 형태로 된 난간 모서리쯤에 도서관 벽을 등지고 기대섰다. 대각선 방향에서 그를 마주 보려니 시선이 자꾸만 그의 등 뒤로 보이는 본관 건물로 비껴갔다. 멀리서 ..
19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3,435
노을처럼 여울지다
짙은 어둠은 말없이 바라보고 서있는 우리를 낮처럼 어색하게 하진 않았다. 잘 가라든가 고마웠다든가 하는 인사를 건네야 할 텐데 우린 서로가 먼저 작별인사를 해주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마간 어두컴컴한 대문 앞에 꼼짝 않고 서있었다. 서로의 시커먼 형체만 바라보면..
18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3,539
노을처럼 여울지다
남자와 단둘이, 그것도 별로 친근하지 않은 서름한 사이의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음식을 먹는다는 건 낯가림이 심한 내게 예삿일은 아니었다. 쫄깃해야 할 면발이 마치 고무줄처럼 질기게 씹혔다. 이럴 땐 묵묵히 먹는 것에만 열중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음식을 씹던 입으로 ..
17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3,560
노을처럼 여울지다
- 혜주씬 염세주의를 동경하세요? 느닷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내 눈을 관통이라도 할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무슨...?- 도서관에 있는 책들이 그런 종류길래요.- 아, 꼭 그런 건 아니에요.- 혜주 씨가 쇼펜하우어..
16편|작가: 오틸리아
조회수: 3,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