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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8-23

혜주씬 염세주의를 동경하세요?
 
느닷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갈색 눈동자가 내 눈을 관통이라도 할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도서관에 있는 책들이 그런 종류길래요.
꼭 그런 건 아니에요.
혜주 씨가 쇼펜하우어 같은 부류에 매료된 건 아닌가 걱정이 돼서요좀 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살았으면 해요그리고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아요툭하면 멍해 있곤 하던데공부에 골몰해야지 딴 생각에 골똘해서야 되나?
 
그는 언제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내가 생각이 많다는 것은 한두 번의 관찰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저에 대해 별걸 다 아시네요.
더 말해볼까요길을 걸을 때 발끝만 본다는 거창가에 앉으면 턱을 괴고 멍해지는 거책을 펴면 한 페이지만 한참 동안 펼쳐놓고 있다는 거가방은 항상 왼쪽으로만 매고무언가를 생각할 땐 고개를 왼쪽으로 갸우뚱하게 기울이는 거그거 말고도 많아요.
저를 몰래 관찰하신 거예요?
 
그의 관심이 싫은 건 아니지만 나는 일부러 정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몰래가 아니고 난 그저 보이는 것을 봤을 뿐인데요.
그럼 이 학교 안에 내내 있었던 거예요?
 
그는 당연하다는 듯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그는 어디에서 그토록 자세히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
분명 곧 떠날 사람이라면서 자리를 내어주기까지 해놓고선.
 
혜주 씨가 너무 발끝만 보고 다녀서 나를 못 봤겠지요나는 항상 혜주씨 주변에 있었는데.
그럼 나한테 자리를 양보하고 다른 자리로 옮긴거에요?
 
그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좀 미안하긴 했다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격이 되었으니
그건 그렇다 치고 나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도서관 내에서하루에도 몇 번씩 문턱 닳게 드나들면서 그를 발견하지 못하다니.
 
공부에 골몰해야지 여학생한테 골똘해서야 되나?
 
나는 복수하듯 그의 말을 흉내내보았다
사실 복수라기보다는 그의 고마운 배려와 나의 지독한 무신경함이 미안해서 일부러 너스레를 떨어보는 것이었지만그는 허를 찔린 것처럼 놀란 표정을 잠깐 지어보이다 다시금 부드러운 미소로 돌아왔다.
 
앞으론 좀 가볍고 밝은 책을 읽도록 해요사고의 늪에 빠져들게 하는 책들 말고.
 
그는 마치 스승이 제자를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달랑 두 살 차이인데도 그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남다르고 인생의 경험치가 많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 그의 관심과 간섭이 싫지 않았다
이 내게 갖는 관심은 부담스럽고 껄끄럽기만 한데 이 사람은 당연히 나에게 그래야 하는 존재인 것처럼 자연스럽고 또 그의 조언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운동장에서 소프트볼을 하던 한 무리의 학생들이 주섬주섬 글러브며 배트를 챙기고는 교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쪽으로부터 서서히 어스름이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주변을 잠식해버렸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몇몇 학생들 모습이 마치 회색의 그림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자퇴서를 내러 왔다는 그는 행정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해버린 후에도 여전히 내 앞에 앉아있었다
나도 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 따위는 이미 접어버린 상태였다
어스름한 황혼빛에 보는 그의 윤곽은 햇빛 아래에서보다 오히려 더 뚜렷한 명암으로 살아났다
이마에서 턱까지 이어지는 날렵한 일직선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의 옆모습이 <로미오와 줄리엣영화에서 로미오 역을 맡았던 배우 레오나드 위팅과 흡사했다.
 
그만 봐요.
 
침묵을 깨는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서로 말없이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나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누굴 많이 닮은 것 같아서요
내가요누굴?
레오나드 위팅
그게 누군데요?
로미오
로미오줄리엣의 연인 로미오?
 
그가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희고 가지런한 치아가 모두 드러나도록 큰 웃음이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아님 내 얘기가 너무 우스웠는지 그는 한참 동안 크게 웃었다
그가 너무 크게 웃는 바람에 나는 주눅 든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었다.
 
내가 그 배우를 닮았나요난 영화를 잘 안 봐서요.
 
영화도 안 본다는 그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가 로미오를 닮았건 테리우스나 안소니를 닮았건 그것은 순전히 나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니까.
 
오늘 자퇴서 낸다 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대화의 본질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더불어 그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이 불쑥 생겨났다.
내 질문에 그가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었다그리고 한참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꼭 다문 입술 아래 봉긋한 턱이 영락없는 로미오 맞구만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또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두워지는데 그만 일어설까요?
 
그는 내 질문은 삼켜 버린 채 의자에서 일어섰다나도 따라서 일어섰다
그가 엉덩이를 툭툭 털자 나도 툭툭 털었다
그가 앞장서 소나무 밑을 벗어났다
나는 아까처럼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가만가만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본관 앞 콘크리트 길까지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었다
잔디밭은 학생들의 왕래로 인해 작은 오솔길이 되어있었다
콘크리트 길로 나서자 오른쪽 구두 굽 소리가 귀에 거슬리게 들렸다한쪽 굽이 닳은 모양이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오른발에 힘을 빼고 걸으려니 걸음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냥 편하게 걸어요.
 
그는 앞만 보고 걸으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좀 모른 척 해주지얄미운 생각에 그를 힐끔 흘겨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여전히 앞만 보면서 걸었다.
 
원래 그렇게 직설적이세요?
 
나는 따지듯이 물었다아무 말 못하고 부끄러워하느니 보다 차라리 후련했다.
 
보이니까 보고 들리니까 듣지요.
 
간결한 대답이었다더 이상 토를 달 수도 없는.
 
우리는 이전부터 늘 그래왔던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교문 앞 횡단보도를 건너 상가들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 안은 온통 간판과 가게의 불빛들로 낮 밤의 구분이 안 될 만큼 눈부시게 환했다
불빛들은 환락의 탈을 뒤집어 쓴 요괴처럼 휘황찬란한 아가리를 쩍 벌리고는 골목을 들어오는 인간들을 하나하나 집어 삼켰다
앞서가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불빛 속으로 빨려들어 어딘가로 사라졌다
혹시나 김영규도 불빛 속으로 사라져 놓치게 될까 봐 나는 그의 뒤를 부지런히 잰걸음으로 따라갔다
김영규가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앞서갔다덩달아 나도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빨라진 걸음의 속도에 따라 딱딱거리는 구두 굽소리도 점점 커졌다
잠자코 앞서가던 그가 오밀조밀한 상가들 가운데 육중한 대리석 건물을 뽐내고 서 있는 은행 입구 계단 앞에 걸음을 멈추고 나를 기다렸다
빨간 우체통과 두 개의 공중전화 부스가 나란히 서 있는 모퉁이를 끼고 돌자 함석을 덧대어 만든 채 반 평도 안되는 자그마한 구두수선 부스가 있었다
 
벙어리인 듯한 수선공이 손짓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비좁은 가건물 안은 수선공이 앉은 자리 말고도 두 사람 정도 겨우 들어가 앉을만한 공간이 있었다
수선공은 손짓으로 우리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조그만 탁상용 선풍기 하나가 돌고 있는 공간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구두약 냄새와 신발 냄새거기에 비릿한 땀 냄새까지 여러 가지 혼합된 냄새들이 한꺼번에 덮치듯이 밀려들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코를 가리며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내 뒤를 따라 부스 안으로 들어오려고 서 있던 그의 가슴께에 내 등을 부딪치고 말았다
등이라는 것사람들이 스스로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등이 얼마나 예민한 감각을 지닌 것인지 그 순간 알았다
잠깐의 부딪침만으로도 그의 흉곽의 생김새와 단단함이 세세하게 느껴졌다
놀라서 돌아보니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아니 밀접한 거리에 그의 얼굴이 있어 놀라고 부끄러웠다
당황하여 중심을 잃은 내 몸이 갑자기 기우뚱거리자 그는 얼른 내 양 어깨를 붙잡아 옆으로 비켜 세웠다.
오늘따라 왜 이리 다리에 힘은 빠지는지
멀뚱히 서 있는 내 앞으로 그가 상체를 숙여 안쪽에 나란히 놓인 파란 슬리퍼 두 짝을 집어 내 발 앞에 내밀었다.
 
이걸 신어요.
 
구두를 벗고 그가 내미는 슬리퍼로 바꿔 신었다
그가 벗어놓은 내 구두를 집어 들자 부지런히 걷느라 땀이 밴 구두에서 발냄새라도 날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부끄러웠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구두를 거꾸로 뒤집어 쇠가 드러나게 닳아버린 굽을 수선공이 볼 수 있도록 내보이면서 건넸다
수선공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구두를 건네받고는 겨우 엉덩이를 붙일 정도나 되는 자그만 나무 의자에 걸터 앉아 망치질을 하기 시작했다
 
맨발로 맨땅에 선 느낌이었다
갑자기 낮아진 내 키에 비해 그는 성큼 커보였다
그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웃었다
왜소해진 키와 더불어 내 발보다 훨씬 큰 볼품없는 파란 슬리퍼가 내가 봐도 우스꽝스러웠다
슬리퍼 앞쪽으로 쑥 내민 발가락 열 개마저도 부끄러웠다.
 
저기로 들어가지요.
 
그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더니 수선가게 바로 맞은편에 있는 분식집을 가리켰다
슬리퍼를 신고 길바닥에 서 있기도그렇다고 냄새에 절은 부스 안으로 들어가 있기도 난감하던 터라 나는 얼른 그를 따라 분식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입구에서 두번째 창가의 테이블로 다가가 커다란 박을 절반으로 잘라 만든 전등갓 아래에 앉았다
하얀 회칠을 한 벽면에는 여러 가지 면류와 만두 종류가 적힌 아크릴 메뉴판이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혜주씨뭘 시킬까요
냉면
난 냉면 별로 안 좋아하는데......
냉면이 왜요?
먹으면 늘 탈이 나서요.
보기보다 허약체질인가 봐요?
그는 또 대답 대신 웃음으로 때우며 메밀국수를 선택했다.
 
남의 말이 하찮으면 대답을 안 하세요?
 
왠지 시비를 붙으려 안달을 쓰는 것처럼 나는 그에게 쫄랑쫄랑 말참견을 하고 싶어졌다
 
내가 그랬나요?
 
그는 능청스레 대꾸하면서 내 앞에 수저를 가지런히 놓아주고 자기 앞에도 수저를 나란히 놓았다
그리고는 머리 위에서 우리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는 전등갓을 툭 건드렸다
전등갓이 앞뒤로 흔들렸다
연노랑 백열등 불빛도 전등의 흔들림을 따라 그를 비췄다 나를 비췄다 하며 둘 사이를 한참 오가다 이내 멈췄다
 
자퇴는 여름 방학 전에 결정을 할거구요절대 허약체질은 아닙니다냉면만 그렇지.
 
흔들리던 전등이 멈추자 갑자기 그는 밀린 대답을 연달아 꺼내놓았다
내 질문들을 귓등으로 흘려듣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언뜻이었지만태연히 웃으며 말하는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치는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