璡은 손님 접대를 위해 바쁘게 방과 거실을 드나들었다.
거실 건너편에 있는 박선배네 부엌과 냉장고를 같이 사용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부산을 떨어도 안방 쪽에서 인기척이 없는 걸로 보아 아마 박선배와 아주머니는 주말마다 다니는 농장에 가신 모양이었다.
璡은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도 한 번씩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그때마다 활짝 웃어보였다.
璡과 어색한 눈 마주침을 피하려고 찬찬히 방안을 훑어보았다.
책상위에는 나무로 된 삼단 책꽂이가 있었다. 1단에는 사전류와 대학교재들이, 2단에는 금박의 글씨가 새겨진 똑같은 표지의 문학전집들이 나란히 꽂혀있었다.
맨 위에는 <포크 기타 백과> 같은 부류의 책들이 여러 권, 그리고 프로야구에 관련된 주간 잡지들이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책상 옆으로는 비키니 옷장이 하나, 그 옆쪽 벽에 전신거울 한 개 그리고 거울아래 방바닥엔 연초록 바탕에 모란꽃을 닮은 커다랗고 빨간 꽃무늬가 새겨진 이불과 베개가 반듯하게 포개어진 채 놓여있었다.
어딘지 璡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촌스러운 이불이었다.
璡의 껑충한 몸뚱이가 그 초록 꽃무늬 이불에 누워 있을 것을 상상하니 마치 풀밭에 사마귀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 연상되어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 혜주 넌 왜 혼자 실실 웃고 있니?
유정이 빨간 전기밥솥을 들고 들어오다가 혼자 실없이 웃고 있는 나를 보고 한마디 내던졌다.
그 표정이 왜 혼자만 놀고 있느냐고 꾸짖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친구들은 한참 점심 준비를 거드느라 부산을 떨고있었다.
유정은 들고 온 밥솥을 내 무릎 앞에 툭 내려놓고 다시 방을 나갔다.
머쓱해진 나는 밥솥 뚜껑을 열어 머리수만큼의 밥을 퍼 담았다.
제법 차림 메뉴가 그럴싸했다. 특히 璡과 그 친구의 합동 작품인 닭볶음이 아주 그만이었다.
감자와 풋고추만 넣은 된장국, 박선배네 마당에서 직접 딴 고추와 깻잎, 그리고 璡의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김치와 밑반찬들, 거기에다 선배네 냉장고에서 빌려온 오이와 토마토까지.
璡의 집들이를 겸한 주말 한낮의 점심은 모두에게 즐거움과 포만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점심을 마치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璡이 나보다 한 살 위라는 것과 이곳이 고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난번 미팅 때 나는 璡에 대한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었다.
그저 璡쪽에서 나에 대한 호구조사를 집중적으로 해 왔고 나는 그 질문들에 건성건성 대답을 했을 뿐이어서 그가 경영학과 양 진이라는 거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불량스럽게 보이던 웨이브 진 헤어스타일도 원래 반 곱슬머리를 기르다 보니 자연스레 컬이 생긴 것이라는 말에 무턱대고 비호감을 가졌던 내 선입견에 조금은 미안한 생각도 들긴 했다.
아까부터 자꾸만 내 시선이 기타에 쏠리는 것을 눈치 챈 璡이 갑자기 일어났다.
앉아서 보는 그의 긴 다리는 서서 볼 때보다 훨씬 더 길어보였다.
물이 바라서 거의 흰빛이 도는 연하늘색 청바지가 璡의 볼록한 골반 뼈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었다.
璡은 책상모퉁이 구석에 끼어있는 기타를 들고 와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익숙한 동작으로 기타를 튜닝하기 시작했다.
두 줄씩 음을 짚어가며 여섯 줄의 튜닝을 마치고는 Pipeline을 연주했다.
LP판으로만 듣던 그 유명한 The Ventures 그룹의 연주곡을 璡을 통해 이렇듯 생생한 연주로 들게 될줄이야.
더구나 그 곡은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흉내내기 조차 힘든 곡이었다.
璡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강렬한 비트를 쏟아내었다.
현란한 璡의 연주에 우리는 완전히 넋이 빠져 저절로 고개를 까딱이거나 무릎을 들썩거리며 박자를 맞추었다.
璡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마지막 스트로크를 마치고는 피크를 쥔 오른손을 포물선을 그리듯 부드럽게 올렸다 내리며 연주를 마쳤다.
璡의 연주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나는 그의 긴 손가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