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으로 향하는 입구 양 옆으로 연분홍 꽃이 무더기로 만개했다.
그 향이 얼마나 진하던지 바람이 지나가는 교정 안 구석구석까지 향기가 흩날렸다.
그것이 라일락꽃이라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이름만 알고 있을 때는 왠지 잔잔한 꽃무늬 원피스를 연상하게 되는 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보니 그 생김새는 잔잔하기 보다는 오히려 발랄하고 당돌한 느낌이었다.
아주 조그맣고 가녀린 하얀 꽃잎일 것이라는 내 상상과는 달리
씩씩하게 죽 뻗은 분홍빛 긴 꽃대궁 위로 네 잎을 활짝 펼친 현란한 모습에
향기까지 진한 것이 수줍기는 커녕 저돌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 과는 축구 본선 4강 진출만으로 끝이 났다.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대학생이 되어 처음 맞는 체육대회에서
4강까지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모두들 흥분에 들떠있었다.
스포츠라는 것이 황량한 폐허처럼 마음을 닫고 사는 나에게도
일체의 소속감을 갖게 해준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일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방인과도 같던 내가 하루를 운동장 스탠드에서 다른 학생들과 뒤엉켜 보낼 수 있었던 건.
체육대회의 막바지 자축 기념주로 마신 막걸리 한 사발 때문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가지처럼 나무 벤치에 질펀하게 쓰러져 있던 나는
몇 잔의 술보다 더 취할 것 같은 라일락 향기를 코끝으로 들이 마시며 널브러져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마셔보는 술이었다.
주량도 유전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나 오빠도 술을 입에 대지 않으셨다.
나는 내 몸 안에 알코올 해독제가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몰랐었다.
학과 친구들이 내미는 술잔을 이리저리 피하다가
결국 교수님의 피할 수 없는 레이더에 걸려 딱 한 사발 마신 것이
애꿎은 라일락 가지에 토사물을 쏟아 붓고는 바로 옆 벤치에 드러눕고 만 것이었다.
내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늘어지게 한잠을 잔 것 같으면서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몸을 일으켜 눈을 떠보니 학교가 아닌 처음 보는 방안이었다.
- 아이구, 혜주 이제 정신 좀 나니?
누군가 했더니 우리 집 바로 뒤에 사는 경영학과 3학년 박선배였다.
박선배는 두통으로 오만상을 찌푸리며 앉아있는 나에게 냉수를 건넸다.
- 너 벤치에 뻗어있는 것을 우리 과 후배랑 둘이서 업고 왔다.
내가 지나가다 너를 발견해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너 아직도 벤치에 고꾸라져 있었을 거야.
너희 과 애들은 어떻게 너 사는 곳을 아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니.
다들 웅성웅성 모여서 걱정만 하고 있드라.
이 친구한테 고맙다고 인사나 해, 너 업고 오느라 고생했으니까.
그때서야 나는 방안에 박선배 외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머리맡에 앉아 있던 그를 등지고 일어나 앉는 바람에 나는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무나 작위적인 듯한 우연이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璡의 등에 업혀 박선배의 집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갑자기 수치심이 밀려왔다.
주정뱅이처럼 아무렇게나 벤치에 쓰러져 잠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등에 내 몸을 업혔다는 것,
그리고 내 잠든 모습을 그가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사실 박선배도 나로서는 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엄마가 이곳에 내려와 계실 때 유일하게 왕래하던 사람이 박선배의 어머니였다.
두 어머니의 오랜 인연 때문에 가끔 오가며 마주치면 인사나 나누는 정도일 뿐이었다.
선배는 우리 엄마를 이모라고 불렀지만 나는 선배의 어머니를 그냥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엄마는 내 못된 성격 탓이라고 늘 지적을 하셨지만 타고난 것이 그러했으므로 고칠 수도 굳이 고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전기 입시에 낙방을 하고 이곳에 내려 왔을 때
몇 번인가 아주머니의 저녁식사 초대를 전하고자 박선배가 우리 집 대문 앞에 찾아왔었다.
그때마다 나는 대문을 빠끔히 열어 얼굴만 내밀고는 선배에게 거절의 뜻을 비쳤었다.
내가 고집을 부리면 아주머니는 갓 만들어낸 음식들을 박선배를 통해 기어이 보내주시곤 하셨다.
아마도 고집스레 혼자 고향집에 내려간 나를 아주머니께 특별히 당부하신 엄마의 뜻이었겠지만
제발 나를 좀 내버려 두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으므로 박선배나 아주머니의 관심은 내게는 큰 부담이었다.
선배는 타고난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밝아보였다.
찬바람 쌩쌩 부는 나에게도 항상 웃는 얼굴로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동네에서건 학교에서건 나와 마주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런 선배이기에 평소 살갑지도 못한 술에 떨어진 나를 누군가에게 들쳐 업혀서라도 기필코 자기 집에 데려왔을 것이었다.
- 이 친구는 우리 과 1학년 양 진, 이 쪽은 교육학과 1학년 윤혜주야. 둘이 이야기라도 좀 나누고 있어.
박선배가 간단히 우리 둘을 소개시키고는 방을 나갔다. 우리는 박선배 앞에서 서로 구면이라는 티도 내지 않고 어색하게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 속은 괜찮으세요?
박선배가 방을 나가자 그가 물었다. 난 가만히 고개짓만 했다.
뭔가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속이 울렁거려 입을 뗄 수가 없었다.
- 오늘 운동장에서 줄곧 혜주씨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러고보니 마지막까지 우리 과랑 리그전을 벌였던 게 경영학과 였다.
스탠드에 두 과가 나란히 앉아 내내 응원전을 펼쳤건만 나는 璡의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으므로 그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하필이면 박선배에게 발견되어 璡의 등을 빌리게 되었는지 그제야 모든 상황이 정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