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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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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9-01

그 후로 과는 딱 한번 마주쳤다
한참 기말고사를 치르느라 캠퍼스 전체가 적막 같던 날강의실로 이동하던 길에 스치듯 그와 마주쳤을 때 우리는 서로가 눈길조차 건네지 않았다
찬 기운이 쌩하게 도는 과 내 모습을 보고 순길은 어떤 조짐을 느낀 것 같았다
함께 걷던 동곤이 오히려 난처한 듯 어색한 눈인사를 보내며 의 뒤를 따랐다
나로 인해 순길과 동곤의 사이까지 소원해지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다행히 모난데 없이 숭글숭글한 순길의 성격이 둘 사이를 잘 조절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김영규는 시험기간 동안 분주히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는 나를 지켜보며 응원을 보내주었다
백지로 답안을 낼지언정 이름이라도 적어내야 하는 내 입장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리고 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함인지 매일 아침 집 근처 우체국 앞 승강장에서 나를 기다렸고 오후에는 집 앞까지 동행해 나의 안전한 귀가를 확인하고서야 돌아갔다
그의 시간을 빼앗는 수고로움을 거절해 보았지만 그는 기껏해야 며칠이라며 막무가내였다
 
그와 아침부터 저녁나절까지 함께하던 그 며칠 동안 우리의 호칭에도 변화가 생겼다

- 혜. 주. 야!  내가 두살 위니 이제 말 놓아도 되지?

어느날 그는 조심스럽게 씨자를 빼고 혜주로 불렀다
처음 으로 들어보는 그의 반말이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어감에서 주는 느낌이 한층 친근하고 의지가 되었다.
여동생이 없는 그는 내가 오빠라 불러주길 원했지만 나의 외골수 성향이 용납하지 않았다
엄연한 내 가족이 있는데 타인은 결코 나의 부모나 언니 오빠가 될 수 없다는 생각
그것은 이미 박선배로부터도 몇 번인가 지적받은 바 있었다
무남독녀인 박선배는 내가 살갑게 애정언니라 불러주길 원했지만 한 번도 언니라 불러본 적이 없었다
박선배의 엄마를 기필코 아주머니라 부른 것처럼
하지만 내가 김영규를 오빠라 부르지 않는 것은 꼭 그 때문은 아니었다
아직 그의 이름조차 불러본 적이 없으니까
그에겐 어떤 호칭도 붙일 수가 없었다
흔히들 여학생이 남학생을 부를 때 칭하는 형도그가 원하는 오빠도그렇다고 영규씨도...
 
종강을 하던 날 모두들 처음 맞이하는 여름방학에 들뜬 모습이었다
우리 과에서는 몇몇 학생들의 주도로 캠핑과 수련회 계획을 세웠다
그들이 들떠있는 것과 방향은 다르지만 내게도 방학이 주는 의미는 뒤엉킨 것들의 정리와 새로운 시작에의 기대가 있어 특별하기는 했다
나는 과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도서관으로 갔다
오늘 자퇴서를 내고 도서관에서 기다릴 거라던 김영규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가 올 때까지 방학 중에 해야 할 일들을 적어보았다
공부는 필수도서관아니지 도서관은 삭제
한여름 뙤약볕을 받으며 굳이 학교도서관을 오갈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 다녀오기윤희랑 하고 싶은거 다하기하루 한 시간씩 운동하기오전에 앞산 오르기
매일 일기쓰기그리고.......김영규.......김영규.......김영규.......
 
그의 이름을 적어놓고 갑자기 막막해졌다
며칠 새에 급격하달만큼 친해져 버린 그가 내 곁에서 떠난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오가던 등하굣길함께 숨소리 들으며 마주 앉았던 도서관내색은 안했지만 그가 있어 든든했던 생활들그 모든 것들을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내 이름 닳겠어김영규와 매일 안부 전하기한달에 한번은 만나기김영규와 여행하기,등등  뭐 이런걸 적어야지.
 
어느 틈엔가 그가 내 뒤에 와 있었다
그는 내 어깨 위에 손을 얹더니 힘주어 어깨를 감쌌다
그 느낌이 마치 무언가를 마무리 짓는 인사 같아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방학 동안 자리를 지켜줄 몇 권의 책만을 남겨두고 창문 난간에 쌓여있던 책들을 가방에 담았다
가방끈이 무게를 감당할 만큼만 담고 나머지는 김영규와 내가 몇 권씩 나누어 들었다
나는 남겨진 책들 중에 <생의 한가운데>를 집어 들었다
그 책만은 왠지 사십여 일을 주인 없는 도서관에 방치 해두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책이 가까이에 있지 않으면 내 자신이 방치된 듯 허전할 것 같았는지도 모른다
내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가 나보다 그 책이 더 소중해라고 유치하게 물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동그랗게 치뜬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유치한 질문만큼이나 유치한 그의 표정 때문이었다
늘 반듯하던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짙은 두 눈썹이 날아가는 갈매기마냥 찡그려진 상을 보니     내 행동이 어지간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나한텐 그냥 담배 같은 것일 뿐이야
담배?
남자들은 힘들거나 답답할 때 담배를 피우잖아난 가끔 멍해질 때마다 이 책을 펴서 읽곤 해
나는 힘들어도 담배는 안피는데린저나 니나에 너무 심취하지 말았으면 해탐닉하려거든 김영규를 탐닉하라구.
 
그는 배불뚝이가 된 내 가방을 어깨에 메고 도서관을 나섰다
자유를 얻은 학생들이 캠퍼스 도처에 흩어져있었다
상징탑 아래 잔디밭에 순길과 동곤의 모습이 보였다
늘 동곤과 쌍을 이루던 은 보이지 않고 대신 순길이 그 옆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은 한참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에 열중해 있는 듯했다
못 본 척 그냥 지나치려는데 등 뒤에서 순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혜주야잘 가너한테 할 말 있는데 며칠 내로 집으로 갈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손만 흔들어 보이며 성큼 멀어진 그를 따라 잡으려 곧장 걸어갔다
순길이 나한테 할 말이 뭘까생각하며 그의 옆으로 바싹 따라붙었다
그깟 책 때문에 정말 화가 났나하며 슬쩍 살펴본 그의 얼굴은 뭔가 모를 상념에 잠겨보였다
묵묵히 걷던 그가 오른쪽 어깨에 멨던 가방을 앞쪽으로 돌려 배 위에 포개듯 안으면서 불쑥 말을 꺼냈다.
 
우리 오늘은 좀 멀리 나가볼까?
멀리 어디로이렇게 책까지 잔뜩 들고서?
이깟 책 몇 권이 얼마나 무겁다고혜주널 업고도 갈 수 있어.
 
그는 자신이 토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려는 듯 장난스럽게 말하며 내 손에 들고 있는 책까지 빼앗아 들었다
나는 그에게서 다시 책을 빼앗았다.
 
교문 앞 승강장에서 금구리행 버스를 탔다
금구리가 어딘지는 몰라도 오가는 버스 앞 유리창에서 자주 보던 지명이었다
우리는 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내 무릎에는 책을 가득 담은 내 가방이그의 무릎에는 나머지 책들이 가슴께까지 차곡하게 쌓였다
버스는 번화한 시가지를 벗어나 한참을 달렸다
휙휙 지나가는 차창 밖으로 파란 들판이 보이고 연보라 빛 수련이 가득 피어있는 저수지가 보이고 누군가가 벗어놓은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초록빛 잡풀이 우거진 논둑길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버스가 비포장도로를 지나면서 흙먼지를 일으켰다
미처 창문을 닫기도 전에 앞에서부터 날아온 흙먼지가 뒷자리에 앉은 우리를 덮쳤다
순식간에 날아온 흙먼지에 껄끄러운 눈을 비비면서 얼른 창문을 닫았다
버스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우리는 자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두 손으로 무릎에 쌓여있는 책들을 단단히 부여안은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마지막으로 멈춘 곳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여기가 내가 태어난 고향이야.
 
커다란 부채꼴 모양의 호수를 빙 돌아 호의 가장자리에 능수버들이 늘어진 가지 아래로 팔각으로 지어진  정자 난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태어난 곳은 부채의 손잡이 쪽에 위치해 있어 앞으로는 넓은 호수를 바라보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일곱 살까지 여기 살았어그땐 이 호수가 바다같이 넓어 보였는데 고등학교 때 와보니 그냥 호수더라구
 
참 평화로워 보여.
평화롭지가끔 호수에 사는 물귀신이 나타나는 거 말고는.
물귀신이 있다구?
해마다 한명씩 잡아간대
 
그는 영혼도 없는 농담을 몇마디 하더니 갑자기 말을 멈췄다
나는 발아래 수면 위를 떠다니는 소금쟁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 몸길이의 배나 되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물 위를 걷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앙증맞아 보였다
소금쟁이가 지나가는 곳마다 작은 물결이 일었다
물결의 파장을 따라다니다 보니 울렁증이 났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갑자기 내 어깨를 감싸며 끌어당겼다
단단한 그의 빗장뼈에 내 왼쪽 뺨이 짓눌렸다
그의 심장소리와 내 심장소리가 이중주로 들려왔다.
 
혜주야나 있잖아너 혼자 두고 못 갈 거 같아.
 
나지막한 그의 말소리가 입이 아닌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것처럼 먹먹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