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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9-02

엇박자로 뛰는 그와 나의 심장소리가 철교 위를 지나는 열차의 마찰음처럼 커지고 있었다
그의 가슴께에 엉성하게 기댄 채 멈춰버린 동안 나의 목 근육이 점점 굳어가는 듯했다
살짝 몸을 빼보려 했지만 그의 팔이 억세게 나를 감싸 안았다
그는 조심스레 흘러가는 말처럼 함께 서울로 가자고 제의를 했지만 슬쩍 내던져 본 말이 아님을 그의 조급한 심박동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마음은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데 지금은 갈 수 없는 이유굳이 가족들을 떠나 혼자서 이곳에 머무르는 그 이유를 아직은 그에게 밝히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쳤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데 눈물을 닦을 수조차 없었다.
김영규와의 작별 때문만은 아닌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뒤엉킨 눈물이었다.
그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나약해지는 내 자신이 싫어 흐느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속절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어깨를 적시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 왜 울어바보처럼
김영규는 내가 울고 있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는지 조심히 내 상체를 세우고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는데도 한동안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지툭하면 눈물이나 보이고이러니 내가 어떻게 너를 두고 가겠어
 
그의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에 꾹꾹 눌렀던 설움이 터져버렸다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나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한참을 울었다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김영규는 내 어깨를 감싼 채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 이제 좀 진정이 됐어눈이 빨갛네혜주 너는 울고 나서 빨개진 얼굴이 예쁜거 알아?
 
내가 부끄러워할까봐 일부러 하는 말이겠지만 내 양 볼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은 진심이 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살았던 집에 가볼까?
 
내 앞에서 흔들리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더불어 둘만의 호젓한 분위기까지 가라앉은 것이 싫었던지 그가 먼저 일어서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호수 둑을 지나 마을입구로 들어서는 길에유리창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해묵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창문을 반쯤 열어둔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몇 걸음 지나니 어른 몇 명의 팔을 합쳐야만 둘레를 가늠할 수 있을만한 커다란 노거수(老巨樹두 그루가 마을 어귀에 떡 버티고 서있었다
 
이게 무슨 나무인지 알아?
느티나무?
팽나무야천년을 산다는 나무이 나무도 아마 오백년도 훨씬 넘었을 걸나 어렸을 때는 저 구멍가게에서 파는 사탕보다 이 팽나무 열매를 더 많이 따먹고 놀았어열매로 새총도 쏘고.
 
그는 고향에 온 감회가 새로운지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추억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린 김영규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나지막한 돌담길을 빙 돌아 들어가 담장 대신 탱자나무로 둘러싸인 집 앞에 그가 멈춰 섰다
푸르딩딩한 탱자 열매가 나무마다 가득히 열려있었다.
 
이집이야.
 
그는 대문도 없는 폐허같은 집안으로 앞장서 들어갔다
발밑에는 마당인지 밭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억센 잡초들이 무성히 자라있었고 오랜 시간 주인의 손길을 받지 못한 농기구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풀 섶에 흩어져 있었다
 
- 뱀이 나올지도 모르니 내가 디딘 곳만 딛고 따라와.
 
그가 먼저 성큼 발을 디뎌 길을 터준 곳을 따라 조심조심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가로운 터전에 갑자기 나타난 방해꾼에 놀란 메뚜기들이 여기저기서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정남향을 향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폐허의 마루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췄다
어디 엉덩이 붙이고 앉을만한 곳 하나 없이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인 고향집 마루 앞에 선 그의 눈빛이 한없이 처연해보였다
 
아버지가 이 집을 버리고 떠나실 때의 마음을 이젠 알 것 같아
 
그는 마루를 돌아 건물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멈춰 서서 바라보고 있는 곳엔 지붕 높이의 두 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커다란 감나무 세 그루가 우리를 내려다보듯 우람하게 서있었다
 
이 감나무들은 나랑 나이가 같아아버지께서 내 위로 누님을 낳고 11년 만에 나를 낳은 기념으로 심은 거야왼쪽 두 그루는 단감나무고 한 그루는 떫은 감이야가을에 감이 익을 때쯤 한번 다녀가면 좋을 텐데 그럴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네.
 
그는 뒷마당 한쪽에 흙으로 덧대어 만든 아궁이쪽으로 다가가 허리높이만큼 쌓아져 있는 장작더미 위에 책과 가방을 올려놓았다.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 같은 녹이 슨 가마솥 뚜껑을 열어보고 다시 닫으며 주변에 흩어져 있는 장작들을 아궁이 속으로 툭툭 차 넣었다.
 
불을 피워보고 싶은데 라이터가 없네나중에 늙으면 이곳에 돌아와서 살고 싶어내 아내랑.......
 
그의 입에서 나온 내 아내라는 호칭이 일순간 그와 나의 거리를 멀리 느껴지게 만들었다.
 
근데 내 아내 될 사람이 공부를 열심히 해줘야 하는데 흔들릴까봐 자꾸 걱정이 돼.
 
내 아내그의 아내연거푸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아내라는 낯선 호칭에 꽂혀 그의 뒷 말들을 흘려버렸다
그 바람에 그가 한 말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 표정은 굳어졌다.
김영규가 내 반응을 살피려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갑자기 서먹해진 느낌으로 한참 동안 멍하니 그의 눈동자만 바라보았다
저 갈색눈동자 속에 담길 그의 아내는 누가 될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존재가 갑자기 그와 나 사이에 끼어든 것처럼 묘한 질투심이 생겼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그렇잖아도 마음이 아픈 내 앞에서알지도 못하는 아내 이야기를 왜 하는건지
김영규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겨우 진정된 마음이 다시 무너지며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눈앞에 서있는 그의 얼굴이 점점 얼룩져 보이기 시작했다.
 
- 바보혜주는 울보구나
 
그는 내 표정을 보고 놀란 듯 한발짝 다가서며 두팔로 나를 안았고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그렇게 있었다.

- 나는 자신 있어혜주 너만 흔들리지 않으면 돼알았지?
 
흔들릴까봐 자꾸 걱정이 된다는 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잠깐이었지만 김영규에게 다른 여자가 존재한다는 상상이 끔찍했던 것 같다.
아직 먼 훗날의 일이겠지만 그가 나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금구리 호숫가 버스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서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돌아오는 버스 차창으로 붉은 노을이 마치 마블링 물감처럼 여울지고 있었다.
노을처럼 여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