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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8-28

앞서나간 김영규는 도서관 현관 기둥에 기대어 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와 몇 발자국 떨어져 디귿자 형태로 된 난간 모서리쯤에 도서관 벽을 등지고 기대섰다
대각선 방향에서 그를 마주 보려니 시선이 자꾸만 그의 등 뒤로 보이는 본관 건물로 비껴갔다
멀리서 보는 본관은 초록의 담쟁이넝쿨이 창문을 제외한 하얀 건물 벽을 온통 휘감아 잠식해 가고 있었다
거대한 곤충의 더듬이처럼 위쪽을 향해 뻗친 넝쿨의 끝부분 위로 곧 비라도 쏟아질 것처럼 잔뜩 찌푸린 하늘이 뭉텅뭉텅한 먹구름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어제 잘 잤어요?
잘 잤어요근데 언제부터 내 앞자리에 있었던 거예요?
혜주씨가 눈이 빨개져서 들어오기 바로 전쯤그 전엔 미대 쪽 창가에 있었는데 혜주씨 감시하려고 일부러 바꿔 앉았어요그런데 아까 울고 들어온 거 아니죠?
 
그는 라면국물 때문에 눈물 콧물 흘리고 들어오는 내 모습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나는 차마 라면 먹다 사레들린 사연은 말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그 자리에 그가 있었더라면 분명 물컵과 휴지를 쑥 내밀면서 조심성 없이 먹는다고 한마디쯤 했을 것이었다.
 
비가 곧 쏟아질거 같은데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요.
 
우리는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가 가방을 챙겨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은 저녁나절처럼 어둑어둑했다
바람 한 점 없이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차라리 얼른 비라도 쏟아져 내렸으면 싶었다
누가 먼저 동행하자는 말은 없었지만 김영규는 집으로 향하는 내 옆을 나란히 걸었다
 
이제 2주 남았네요.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2주라는 건 그가 이곳에 있을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마음의 동요 따윈 느끼지 말아야지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번화한 거리에 들어서 우체국 앞을 막 지날 즈음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잠시 우체국에 들어가 비를 피할까 하다 차라리 큰 비가 오기 전에 서둘러 집에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아스팔트 위에 점점이 물방울 그림이 돋아났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바삐 움직였다그들 속에 섞여 나와 김영규도 뛰기 시작했다
 
집 근처 공터에 이르자 흙냄새가 날아왔다
후두둑 빗방울이 돋을라치면 맨 먼저 맡아지던 그 냄새
그 냄새의 근원은 엄마의 무릎이었던 것 같다
여름 한낮에 엄마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가 코끝에 느껴지는 흙냄새를 맡다 보면 꼭 비가 왔던 기억
그땐 그것이 엄마의 젖가슴이나 무릎에서 나는 냄새일거라 생각했었다
 
빗방울은 금세 빗줄기가 되어 쏟아졌다
우린 들고 있던 가방을 머리 위에 올린 채 골목길을 달렸다
대문 앞에 당도했을 땐 이미 흠씬 젖어버린 후였다
그는 가방을 대문 앞에 내려놓고 양손으로 툭툭 머리부터 상체와 하체를 골고루 털어냈다상고머리보다 살짝 웃자란 그의 머리카락은 금방 물기가 가셨다
그가 물기를 털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냥 우산을 들려 보내야 할지 집안으로 들여야 할지 잠시 망설였지만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에 우리는 급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혼자 사는 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현관 앞에 아빠의 신발을 놓아두었다김영규는 남자 신발을 보더니 잠시 주춤거렸다
 
괜찮으니 들어와요.
 
그는 두 켤레의 신발 옆에 나란히 구두를 벗어놓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가 지극히 손님 같은 머쓱한 모습으로 거실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동안 
나는 화장실에서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
머리야 어떻게든 털어서 말리면 되겠지만 흠뻑 젖은 옷 때문에 마음이 쓰였다
그렇다고 그에게 갈아입을 옷을 내어주기도 민망할듯했고 마땅히 내어줄 만한 옷도 없어 수건을 몇 장 더 건넸다
내가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올 동안 그는 액자 속으로 들어갈 듯한 자세로 거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진 속의 다섯 식구는 너무나 평화롭고 사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가 단발머리에 교복 차림의 내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 쑥스러웠다
 
가족들은 어디 계세요?
 
처음으로 나에게 사적인 질문을 했다
나는 부엌을 뒤져 거의 돌멩이가 되기 직전으로 굳어버린 커피를 스푼으로 겨우겨우 긁어내 두 잔을 타가지고 나왔다
 
서울에요.
 
그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혼자 지내기 무섭거나 외롭지 않아요?
처음엔 무서워서 불을 다 켜고 잤는데 이젠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어요괜히 바래다주러 왔다가 비가 안 그쳐서 어떡해요?
오히려 잘됐잖아요비 덕분에 혜주씨 집안에도 들어와 보고.
 
김영규가 거실 이곳저곳을 시선으로 훑는 동안 나는 하릴없이 거실과 부엌을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거실 창가 커튼 앞에 놓인 전축으로 다가갔다
전축 아래 칸에 있는우리 삼형제가 용돈을 털어 마련한 LP 판들 중 내가 좋아하는 곡들로만 가져다 놓은 몇 장의 판 중에 폴모리아 악단의 연주곡을 골라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음악이라도 들으니 한결 어색함이 덜했다.
이렇게 세찬 비가 내리는 날엔 경음악 듣는 것을 즐겼다혼자서 들을 때랑은 느낌이 달랐다.
Love Is Blue, El Bimbo, 눈물의 Toccata가 흐를 때까지 그는 깍지 낀 양손을 흰 수건을 덮어놓은 허벅지 위에 올린 채로 묵묵히 듣고 있었다
김영규도 경음악을 좋아할까아니면 ABBA의 노래를 틀까잠시 갈등했지만 그가 음악에 집중하고 있음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어느 심리학 책에선가 오른손 엄지를 위로 깍지를 끼는 사람은 적극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김영규는 분명 이성적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손등 위로 부풀어 오른 굵은 핏줄과 땀구멍의 결을 따라 듬성드뭇하게 돋아난 털을 보면서 문득 여자처럼 희고 가느다란 손으로 기타를 치던 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지금 이순간 김영규의 손과 비교 대상으로 을 떠올렸을까.
나는 생각을 가다듬으며 부엌으로 갔다.
 
Isadora로 곡이 바뀌고 있었다
들을 때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사뿐사뿐 왈츠를 추는 느낌을 주는 Isadora를 들으며 박선배네서 가져온 참외를 깎아 들고 나오는데 김영규가 거실의 커튼을 활짝 열어놓고 담장 뒤 의 방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뭔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졌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이웃집 외간 남자로부터 몰래 연정을 고백받은 아낙이 남편에게 행여 그 사실을 들킬까 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이랄까
하지만 그는 나지막한 담장 너머 비 내리는 박선배네 뜰을 고즈넉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엔 담장보다 훨씬 큰 해바라기가 함초롬히 비에 젖어 고개를 떨군 채 서 있었다
커튼을 닫아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면서 비오는 날의 감상에 빠진 그에게 참외를 권했다
신경쓰지 말아야지하는 마음과는 달리 소파에 앉아 참외를 먹으면서도 슬쩍슬쩍 박선배네 집 쪽으로 눈이 돌아갔다
선배 집 현관에서 마당까지 길게 이어 놓은 슬레이트 차양의 구불구불한 홈에서 폭포수처럼 굵은 물줄기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보기보다 겁이 없는가 봐요이런 집에서 혼자 지내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혜주씨 혼자 지내는 것보다 옆에 방들을 세를 내줘도 될 거 같은데.
모르는 사람하고 같이 사느니 혼자 사는 게 편해요가끔 언니랑 오빠가 다녀가기도 하고방학 때는 부모님도 오실 거예요
가족사진을 보니 참 단란해 보이네요혜주씬 막내라서 좋겠어요난 장남이다 보니 부모님 기대도 크시고 벌써부터 짊어져야 할 짐들이 많아요부모님은 나를 꼭 의사로 만들려 하시고 나는 나대로 다른 꿈이 있었는데 결국 부모님 뜻에 굴복하고 말았지요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술술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의대에 지망했다 낙방하고 재수 삼수의 길에 들어선 사연연년생 남동생이 먼저 의대에 합격한 일병역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 학교에 적을 두게 된 일그리고 서울에서 재수하던 시절의 에피소드 같은 이러구러한 사연들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도서관 자리를 양보해줬어요?
혜주씨가 멍하니 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처음 봤을 때 1년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그 후로 어떤 날인가는 혼자 소리 없이 울고 있길래 가서 말을 붙여볼까 말까 몇 번 망설였지요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는 그 고뇌를 안 겪어 보고는 모르니까조금만 참고 견뎌요그리고 제발 다 큰 여자가 아무데서나 훌쩍거리면서 울지 말고.
 
그의 따뜻한 눈빛과 나직한 음성 때문에 괜스레 설움이 복받쳤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처럼 눈앞이 흐려졌다
화장실에 가서 팽 하니 콧물이라도 닦아낼까 하고 막 일어서는데 박선배네 현관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놀라는 내 모습에 그도 놀란 듯했다
담장 너머로 우산 하나가 다가오더니 불쑥 박선배의 얼굴이 드러났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남자와 함께 있는 내 모습을 본 박선배도 놀란 표정이었다
선배는 얼른 담장 아래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도로 얼굴을 드러내며 창문을 열라는 손짓을 했다.
 
손님이 와 있었네엄마가 칼국수 만들고 계시는데 건너와거기도 같이 오세요.
 
박선배는 그에게도 같이 오라는 초대 말을 건네고 우산과 함께 사라졌다
선배의 카랑한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잠잠하던 의 방 창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의 얼굴이 나타나 우리 쪽을 내다보았다
창가에 선 은 나와 김영규를 번갈아 보면서 표정이 굳어졌다
김영규는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잔뜩 눈에 힘을 준 채 을 쏘아보았다
김영규의 홑쌍커풀이 더욱 짙어지면서 갈색 동공이 커졌다.
두남자의 대면을 지켜보기란 골목에서 혼자 을 맞닥뜨렸을 때보다 훨씬 더 난감했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과 커튼을 닫아버렸다
저 사람이 저기 살아요.?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저 사람이란 지칭에서 에 대한 상당한 경계심이 느껴졌다.
 
이사 온 지 좀 됐어요아는 사람이에요?
혜주씨랑 같이 가는 거 몇 번 본 거 같은데친해요?
 
그냥 이웃이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의 눈은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으나 내 굳은 표정 때문이었는지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으면서도 자꾸만 커튼에 가려 보이지 않는 의 방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창문이 열려 있을 때보다 신경이 몇 배는 더 곤두선 것 같았다
들리는 거라곤 음악 소리뿐인데도 어디선가 인기척이 나는 것처럼 온몸의 돌기들이 일제히 귀로 쏠리는 듯했다.
 
남의 말이 하찮으면 대답을 안 해요?
 
지난번 내가 했던 질문을 그대로 그가 흉내 내는 것을 보니 심각해지려다 그만 웃음이 나왔다
 
안 친해요라고 하면 됐어요?
그런데 왜 둘이서 같이 다녀요그것도 여러 번.
궁금해요?
아니........, 질투 나요.
 
그가 심각한 척 뜸을 들였다가 질투라는 표현을 하는 바람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질투라니그와 질투는 영 어울리지 않는데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는 김영규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론 같이 다니지 말아요둘이 사귀는 줄 오해 했잖아요근데 집이 너무 가까워서 걱정이네
 
그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창가로 다가가서 커튼을 살짝 들췄다
잠잠한 의 방 쪽을 확인하고는 창문 고리를 세게 밀어서 잠그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진지한 표정과 행동을 보니 또 웃음이 나왔다.
 
그만 가봐야겠어요비가 그칠 생각을 않네.
 
김영규는 자기가 덮고 닦았던 수건들을 차곡차곡 개켜서 소파 한쪽에 내려놓고는 현관으로 나갔다
빗줄기는 여전히 굵었고 바람까지 거세게 불고 있었다
나는 신발장 옆에 세워져 있는 하얀 바탕에 검정 땡땡이 무늬가 있는 우산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또 내 곁에 잠깐 머물렀던 환영이었던 듯 빗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