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내 천둥번개에 놀라 잠을 못 이루고 겨우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어제 김영규가 하나밖에 없는 내 우산을 들고 빗속으로 사라지면서 내일 아침에도 비가 내리면 데리러 오겠노라 하던 말이 귓가에 웅웅 댔었는데 어느새 아침이 되어있었다.
속절없이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환한 햇살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앞산의 숲은 지난 밤 거센 비바람을 끄떡없이 이겨내고 한층 더 푸른 모습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산허리를 휘감은 옅은 안개가 바람을 따라 서쪽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감쪽같이 둔갑한 하늘 때문에 혹시 김영규가 찾아올까 하는 기대나 설렘은 일찌감치 접고 오전에 있는 영어 수업을 들으려고 학교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내 자리는 순길을 비롯한 여자 학우들에 의해 정해진 곳에 앉게 되었다.
내가 먼저 강의실에 도착하면 그네들이 내 앞뒤나 좌우에 앉고 그네들이 먼저 자리를 잡으면 내 자리 하나를 꼭 잡아놓고 기다려주었다.
다른 수업은 몰라도 영어만큼은 백 프로 출석하는 나를 위해 순길은 어김없이 옆자리를 잡아놓고 앉아있었다.
항상 비염에 걸린 것처럼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영어 교수님이 교재 본문을 한 문단씩 읽어 내려갔다.
교수님의 앵앵거리는 발음을 듣고 있으면 홍콩이나 베트남 출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습관처럼 문장의 끝을 치켜올리는 독특한 억양 때문에 여기저기서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소란스런 틈을 타 순길이 나지막하게 양진, 이라 말하며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쪽지를 건네받으면서 불길한 생각이 언뜻 스쳤다.
璡은 그동안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편지를 써서 학과실 우편함에 넣어두곤 했는데 순길을 통해 직접 쪽지를 보내온 걸 보니 무언가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읽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 영어책 밑에 쪽지를 밀어 넣는 내 행동을 보고 순길이 펜으로 내 어깨를 콕콕 찔렀다.
나는 나중에 읽겠다는 뜻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럼에도 순길은 자꾸만 재촉을 했다.
하는 수 없이 교수님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쪽지를 꺼내 펴보았다.
윤혜주!
혼자 고고한 척 고상은 다 떨더니 너도 별볼일없는 여자라는 걸 어제 알았다.
감히 내 눈 앞에서 커튼을 닫아버려?
네가 아무리 날 냉대하고 피해 다녀도 끝까지 노력해서 언젠가 내 진심을 알아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가증스럽게도 남자와 단둘이 노닥거리고 노는 널 본 순간 너에 대한 모든 감정을 접기로 했다.
그동안 내 눈에 뭐가 단단히 씌었던 것 같다.
너의 그 순수로 위장한 가면 뒤에 숨은 불결함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만나서 따귀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지만 그 위선에 가득 찬 낯짝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경고하는데 앞으로 행동 조심하고 살아.
내 눈앞에 잘못 걸리면 무슨 짓을 벌일지 나도 모르니까.
이건 이웃으로서의 충고야!
심장이 떨리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내 언제 관심 가져달라 했던가?
불결하다고? 남자와 단둘이 있으면 모두 불결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사고야말로 불결한 것이 아닌가?
璡이 이토록 심한 말을 쏟아부으면서 분개할 만큼 내가 잘못한 것인지.
나야말로 그동안 보아왔던 璡의 천진한 웃음 뒤에 이런 극단적인 성격이 숨어있었다는 것이 천만뜻밖이라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파랗게 질린 내 얼굴을 보며 순길은 무슨 일이냐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나는 쪽지를 구기며 영어책을 덮었다.
기말고사 시험범위를 알려주겠다는 교수님의 축축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과 친구들의 놀란 시선을 등 뒤로 따갑게 느끼면서 강의실을 나왔다.
인문대를 벗어나 도서관과 본관으로 향하는 갈림길에 섰다.
어디선가 璡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갑자기 소름이 돋고 한기가 느껴졌다. 집으로 갈지 도서관으로 갈지 망설이다 소나무 숲 벤치로 갔다.
누군가 내 몸을 짓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털썩 벤치에 주저앉았다.
손아귀에 쥔 쪽지를 펴서 다시 읽어보았다. 글씨 하나하나에 저주가 가득 담긴 듯했다.
그것은 경고가 아니라 도발이고 위협이었다.
구겨진 쪽지를 보고 있자니 내 인격과 의지마저 한순간에 구겨져 버린 듯했다.
璡의 입장이 되어 생각을 해봐도 커튼을 휙 닫아버린 내 행동이 좀 못마땅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할 까닭이란 없었다.
굳이 내 잘못이라면 그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간 미팅에서 우연히도 璡의 파트너가 되었던 것과 정말 정말 나랑 상관없이 璡이 이사를 와서 앞 뒷집에 살게 된 것, 그리고 우연인지 의도된 만남인지 모르는 등하굣길 동행 몇 번, 그리고 순길 일행과 함께한 라면점심 몇 번이었다.
미팅을 내 자발적으로 했다 치더라도 파트너가 될 수도 있지. 그렇다고 다 사귀는 건 아니잖아?
누가 우리집 뒤로 이사를 오랬나?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어쩌다 점심 한 두끼 정도 친구들과 함께 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리고 내 집 커튼을 내가 닫건 말건 그게 왜 화가 날 일이며, 이따위 쪽지까지 보내면서 경고할 일인가?
살면서 불결하다는 단어를 사용할 일도 없었을뿐더러 누군가가 나에게 불결하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 황당하고 화가 치밀었다.
발자국 소리도 없었는데 넋이 빠진 듯 우두커니 앉아있는 내 왼쪽 어깨 위로 스윽 우산꼭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검정 땡땡이 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김영규임을 알면서도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잔뜩 굳어버린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나의 시큰둥한 반응에 김영규는 장난스레 내민 우산을 거두고 맞은편 벤치로 가서 내 기분을 살폈다.
억지로라도 웃어졌으면 좋으련만 내 경직된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가 않았다.
갑자기 그는 우산 꼭지로 땅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그가 끼적끼적 파놓은 바닥에는 내 쪽에서 볼 수 있도록 혜주야 왜 그래? 라는 글씨가 새겨졌다.
한 번도 혜주야, 라고 부르지 않던 그가 혜주야, 라고 반말을 쓴 건 친밀함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제스처임을 알면서도 그 순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무슨 일이에요?
그가 얼굴에서 장난기를 거두고 심각하게 물었다.
그에게 굳이 쪽지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누군가에게 그런 내용의 쪽지를 받았다는 자체가 왠지 내 자신이 만만한 여자로 전락해버린 것 같았기에.
璡에게 그런 취급을 당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모욕적인데 김영규에게까지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김영규의 무릎에 비스듬히 기대있는 우산을 집어 들고 아까부터 자꾸만 눈에 거슬리던 우산꼭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단순한 행동이지만 무언가 대답을 해주어야 할 상황을 돌리기에 그만이었다.
적당히 흙가루를 털어내고 닦을 만한 곳을 찾다가 벤치 쪽으로 수그린 소나무 가지에 우산꼭지를 문질렀다.
마찰에 의해 시큼한 솔향이 진하게 배어났다.
그가 璡의 구겨진 쪽지를 집어 든 걸 알았을 땐 이미 쪽지가 그의 손에서 펼쳐져 읽혀진 후였다.
급히 쪽지를 빼앗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가 손아귀를 세게 쥐고 있는 바람에 뺏을 수가 없었다.
- 이 친구 안 되겠는데.......
그의 표정은 비장해 보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璡과 한판 붙어버릴 것처럼.
나는 처음 쪽지를 읽었을 때보다 더 표정도 마음도 굳어져 갔다.
-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나랑 같이 있었다는 이유만인가요 아님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요?
흥분한 그의 갈색 눈동자가 다그치듯 나를 쏘아보았다.
갑작스레 벌어진 사태들이 내 머릿속을 온통 헝클어놓았다.
왠지 이쪽저쪽으로 모두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쪽지를 갈기갈기 찢어 좀 전에 파놓았던 흙과 섞어 발로 밟아 다져놓고 벤치에 앉았다.
그의 발짓에 뭉개진 글씨들이 도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璡과 엮였던 시간들도 그렇게 지워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그 친구 만나볼게요. 혜주씬 걱정하지 말아요.
쪽지를 찢는 것으로 분풀이가 되었는지 그의 음성은 훨씬 차분해진 듯했다.
- 만날 필요 없어요. 내 일이니깐 내가 알아서 해요.
- 내가 관련된 일이잖아요. 그리고 혜주씨랑 상관없이 한번 만나고 싶어요.
한결 부드러워진 그의 음성에서 풍겨 나오는 따뜻하고 믿음직스러움 때문인지 고조되었던 긴장이 조금씩 풀려갔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정말 김영규가 璡과 만나는 일은 없기를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