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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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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9-03

금구리를 다녀온 다음날 오후까지 시체처럼 누워만 있었다. 
갑작스레 모든 것을 놓아버린 해방감이 온몸의 기를 쏙 빼버린 듯 나른했다. 
어제 하루 동안의 일들이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아득하게 되살아났다. 
허기진 뱃속을 채우려 겨우 일어나 거실로 나갔을 때 탁자위에 내던져진 가방과 흩어져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을 안고 들어오자마자 내팽겨 둔 채로 쓰러져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냄비에 라면 물을 올리면서 문득 ‘흔들릴까봐 자꾸 걱정이 돼’ 라고 말하던 김영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나의 무엇이 불안한 것인지, 나의 어떤 면이 그에게 흔들릴 것처럼 보여 진 것인지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 즈음에서 璡의 존재가 떠올려졌다.

흩어진 책들을 모아서 스피커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커튼을 슬쩍 젖혀보았다. 
적막한 뒷집의 뜰만이 사야에 들어왔다. 
아마도 璡은 방학을 맞아 고향집으로 갔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과감히 커튼을 걷고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렸다. 
볼륨을 한껏 올려 Don Mclean의 Vincent를 틀었다. 
‘쏘리쏘리 나잇’ 하며 엉터리 가사를 동시에 쏟아내고 깔깔대곤 하던 윤희와의 추억이 또 어김없이 떠올랐다. 
봄이면 파릇한 새싹이 올라오는 곳에, 여름이면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로, 가을이면 단풍 고운 고궁으로, 겨울이면 두꺼운 얼음이 어는 한강변으로 스케치를 다니면서도 늘 Vincent를 불러댔다. 

팔팔 끓는 냄비에 라면을 부셔 넣으면서 여전히 나는 쏘리쏘리나잇을 흥얼거렸다. 
빈센트가 끝나고 다음 노래가 시작되기 전의 그 짧은 찰나에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 
초인종 소리는 그 전부터 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전축의 볼륨을 줄이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 대문과 지면과의 좁은 틈새로 낯익은 구두가 보였다.

- 집에 없는 줄 알고 돌아가려했어.

그는 나보다 앞장서서 라면 냄새가 가득 퍼지고 있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 점심을 이제 먹는 거야? 

그는 성큼 부엌으로 들어가 뜨거운 냄비를 행주로 조심스레 감싸들고 나와 탁자에 내려놓았다. 
나는 얼른 좀 전에 치워둔 책들 중 한권을 집어 냄비 밑에 놓았다. 서둘러 집어든 것이 하필이면 그가 물려준 수험서 중 하나였다.

- 이러니 내가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지.

나는 얼른 다른 책을 가져와 바꿔놓으려 했지만 그는 무작정 라면을 그릇에 퍼 담고 있었다. 마치 그를 위해 끓인 라면처럼 그는 자연스럽게 젓가락질을 했고 나는 덤으로 얻어먹는 것처럼 어색하게 깨작거리고 있었다.

- 내가 책 때문에 그러는 거 같아?

몇 젓가락 안 되는 라면을 후루룩 먹고 나서 그가 불쑥 질문을 내던졌다. 
나는 젓가락을 든 채 그의 달싹거리는 입술만 바라보았다. 
그가 시선을 돌려 璡의 방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제야 그의 뜻을 이해하고 얼른 일어나서 커튼을 닫았다.

- 이렇게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창문은 활짝 열어두고 누굴 유혹하려고?

그는 농담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분명 璡을 의식한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눈빛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 많이 생각해봤는데, 나랑 같이 올라가는 게 좋겠어.

그가 왜 그토록 璡에 대해 마음을 쓰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일이면 그가 이곳을 떠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함께 있을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일 뿐, 璡의 존재 따위는 염두에도 없었다. 

- 생각해 볼게. 그리고 나에 대해 너무 염려는 하지 않았으면 해.

- 어떻게 염려가 안 되니? 넌 무방비 상태고 배고픈 사자는 널 노리고 있는데. 그걸 알고도 난 떠나야 하고.

- 배고픈 사자? 누가? 

그는 한동안 묵묵히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걱정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 사실은 어제 양 진, 그 친구를 만났어. 자퇴서를 내고 곧장 도서관으로 가려다가 일부러 경상대로 찾아갔지. 한번은 만나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제가 아니면 기회가 없겠더라구, 혜주 니가 걱정할까봐 미리 말하지 않았어. 

그는 평소보다 한톤 쯤 낮은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 갑자기 상상되면서 손에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엄지와 검지사이에 겨우 걸치다시피 끼어있던 젓가락이 무겁게 느껴질 만큼. 
꾸역꾸역 넘긴 면발이 식도에 얹혀 심장을 짓누르는 것처럼 느낄 만큼 숨이 막혀왔다. 

- 남자대 남자로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통하겠지 생각했는데.......

말끝을 흐리고 다시 붙어버린 그의 입술이 순탄치 않았을 두 남자의 만남을 묵언으로 말해주었다.

- 무슨 얘기들을 나눴는데?
- 그냥 나랑 같이 올라가. 

그는 단호했다. 거기에 대고 더 이상 물을 수도 없게. 

- 금방 뒤 따라 갈게. 몇 달 안 남았잖아.

대답은 성큼 그렇게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미 서울 집의 상황들을 그려보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전까지는 절대 돌아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그 다짐을, 잠시나마 김영규 그로 인해 갈등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절대로 깰 수 없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그에 대한 내 마음이 얇아서가 아니고 굳이 저울질을 하자면 스무 해 동안 지녀온 내 아집과 나를 둘러싼 체계들과의 갈등이 그의 존재보다 먼저 선행되어 정리되어야 할 부분들이 있는 까닭이었다.

냄비와 그릇들을 치우고 나오니 그는 냄비 밑에 받쳐두었던 책을 펼쳐들고 한 장씩 넘겨보고 있었다. 

- 일루 와.

그가 소파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옆에 앉기를 권했다. 

선뜻 그의 곁으로 다가가기 멋쩍어 부엌과 거실의 중간쯤에서 회전모드로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를 돌려 그가 있는 쪽으로 고정시켜놓고 가만히 다가가 앉았다. 
로미오의 옆모습을 닮은 그의 콧날과 시선이 내 동선을 따라 움직이다 한 곳에 멈췄다. 그는 선풍기 바람에 팔락이다 멈춘 한 페이지의 귀퉁이 여백에 쓰인 낙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울던 날...

- 기억나?  도서관 앞에 개나리가 막 피려던 그 주였을거야. 니가 내 자리에 앉아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다가가서 등이라도 토닥여주고 싶었어. 

그보다 훨씬 전에 어떤 여학생이 흰색 가디건에 멜빵 청치마를 입고 계단을 올라오는 모습을 처음 봤는데 얼굴에 표정이 없는거야. 
그애가 다른 여학생들과 달리 화장을 하지 않아서 좋았고, 늘 손에 책을 들고 다니는 모범생 같은 모습이 좋았는데 항상 바닥만 보고 다녀서 눈인사를 나눌 기회도 없었어.
그런데 어느날 내 자리에 앉아 있는 그애를 보고 뭔가 말을 나눌 수 있겠다 싶었는데 바보같이 책만 슥 집어갖고 왔어. 
말이라도 붙여볼걸... 후회도 했다가 내 처지에 무슨 연애냐 싶어서 마음을 접었는데 그애가 자꾸 내 눈앞에 보이고 나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게 느껴져서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어.
그래서 자리도 양보하고 책도 건네주고 한거야.

그가 이야기를 하는 내내 나는 금방이라도 엷은 목덜미 살을 뚫을 것처럼 튀어나온 그의 목젖이 까딱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김영규가 나를 지켜보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누군가가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는 것과 그 누군가가 김영규라는 사실이 설레고 행복했다.

- 다신 그렇게 울지 마, 아무데서고. 나 없는 동안 니가 또 도서관 구석에서 훌쩍거리고 있을까봐 걱정이야, 그렇게 힘들어할 바에는 차라리 다 접어버려.

차라리 다 접어버리라는 말을 되씹고 되씹는 동안, 

정말 그래버릴까 하는 마음과 다시는 실패의 쓴맛을 보고 싶지 않은 오기 가득한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동안, 
그가 책장을 넘기며 여기저기 언젠가 자신이 써놓았던 흔적들을 뒤적거리는 동안, 
별것도 아닌 낙서들에 의미를 붙여 웃음을 자아내는 동안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만 그가 가야할 시간임을 온 감각이 지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