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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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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9-21

배롱나무 길을 걷다 우측으로 휘어진 곳에 드넓은 과수원이 나타났다
과수원 정면에서 바라보이는 농막의 왼쪽으로는 푸르딩딩한 풋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나무가 줄을 지어 있고 오른쪽에는 옥수수와 고구마가 심어진 밭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다.
일행들은 박선배를 따라 농막을 향해 걸어갔다.
과수원과 밭의 경계를 구분 짓는 작은 오솔길에 봉숭아와 채송화가 소담하게 피어있었다.
 
- 엄마랑 내가 씨앗 뿌려서 심은 건데...
박선배가 혼잣말인듯 중얼거렸다.
사과랑 옥수수꽃들을 보며 아주머니가 생각났을 터인데 다행히도 박선배는 울지는 않았다.
과 친구들은 이미 몇 번 와본 곳이라선지 익숙하게 농막으로 들어가 제집처럼 움직이며 작업준비를 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농막 내부는 여느 가정집처럼 거실과 방주방화장실이 있는 구조였고 거실에는 커다란 가죽 소파도 놓여있었다.
 
- 누나랑 혜주씨는 옥수수부터 따요우리는 제초작업을 할테니뱀이 나올지 모르니 장화부터 신고.
 
은 농막과 나란히 붙어있는 창고에서 흰색 장화 두켤레를 가져와 현관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박선배를 따라 장화를 신고 옥수수밭으로 향했다.
개망초와 엉겅퀴여뀌같은 잡풀들이 무성한길인지 풀밭인지 모를 땅을 밟고 걸으면서 김영규를 생각했다.
그때는 앞장선 김영규의 발자국대로만 따라 걷느라 무서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풀잎이 서걱이는 소리에도 온몸에 솜털이 일어났다.
김영규가 있었더라면 한걸음 걷고 뒤돌아 나를 챙기곤 했을텐데 박선배는 아랑곳없이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 옥수수밭 처음이지서울에서만 살았는데 니가 밭이란 곳을 가봤겠냐언니가 시범을 보여줄테니 그대로 따라 해 봐.
 
박선배는 자신의 키보다 높은 옥수수대를 한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주먹만큼 여문 옥수수를 손아귀로 잡아당겨 떼어냈다.
선배가 하는 방법을 보고 따라해 보니 옥수수는 쉽게 분리가 되었다
둘이서 한 바구니를 채우기는 순식간이었다.
우리는 떼어낸 옥수수의 겉잎을 한 장 한 장 벗겨서 밭에 버리고 마지막 속껍질만 한겹 남긴 채로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나서 옥수수밭 바로 옆에 땅이 보이지 않게 무성히 뻗어난 고구마 줄기도 한아름 끊었다.
박선배는 불그스름한 고구마 줄기를 들추더니 호미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아직 여물지 않은 고구마들이 줄기를 따라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어른 손가락만한 것부터 아기 주먹만한 보라색 고구마들이 한 줄기에 줄줄이 달려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 밤고구마야크기는 작아도 쪄서 먹으면 맛있을거야그런데 지난번에 너랑 같이 있던 그 남학생은 누구니?
 
고구마를 줄기에서 하나씩 떼어내다가 박선배가 갑자기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순간 당황했지만 언젠가는 언급될 일이었기에 그냥 대답을 하기로 했다.
 
- 공대생인데 학교도서관에서 우연히 알게 된 친구야의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려고 지금은 서울로 올라갔어.
- 그럼 앞으로 계속 둘이 만날 생각이야?
- 아마 그러겠지어차피 나도 겨울방학 때 올라갈 생각이니까
- 그랬구나지난번에 진이가 잠깐 너 이야기를 하드라너를 정말 좋아하는데 니가 마음을 안 열어줘서 혼자 속앓이를 많이 한다고내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 눈치던데.
- 그리고 다른 말은 안 해?
- 너한테 홧김에 편지를 썼는데 후회한다고 하더라그래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 언니나는 양진한테 관심도 없지만 사과도 받고싶지 않아편지도 그렇구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심한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돼.
 
이 김영규와 만난 이야기도 했는지 물어보려다 괜한 관심으로 비춰질까봐 그만두었다.
 
- 나는 엄마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서 너랑 진이랑 두 명의 동생이 생겼다고 생각해그래서 많이 의지되고또 가까이에서 살았으면 하는데어쨌거나 니가 남자친구는 따로 있으니 너희 둘이 좋은 친구로 지냈으면 해진이랑 안좋은 감정이 있는 것도 풀었으면 좋겠어.
- 안좋은 감정이라기보단 관심의 표현이 지나쳤다고 생각해아직도 난 양진의 성격이나 생각을 잘 모르겠어수줍어하는 미소 뒤에 감춘 과격함이 있는건지 어쩐지도언니한테 하는거 보면 참 살가운 사람인데.
- 진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거겠지물론 일방적인 감정으로 너한테 심한 편지를 보낸 건 분명 잘못된 거지만.
- 아무리 그래도 언니가 억지로 양진이랑 나를 엮을 생각은 안했으면 좋겠어그러면 더 불편해져서 나 언니랑도 담쌓을지 몰라.
 
박선배는 갓캔 고구마에 묻어있는 흙을 호미로 살살 긁어 털어낸 후 하나씩 바구니에 담고는 아까 한아름 꺾어둔 고구마 줄기 하나를 집어 들고 끝부분을 살짝 꺾어 껍질을 잡아당겼다
보라빛 길다란 껍질이 벗겨지면서 연초록의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났다
나도 따라서 줄기를 벗겨 보았다
쉽게 벗겨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중간에 뚝 부러지는 것도 있었다
한참 껍질을 벗겨내다 손바닥을 이리저리 뒤집어보았다.
어느새 손톱이 갈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손톱을 살펴보는 나를 보고 박선배는 웃었다.
 
- 혜주야이따 봉숭아 꽃 따서 물들여줄게그럼 덮어질 거야.
 
우리는 수확한 고구마와 옥수수를 각각 두 번에 나눠 농막으로 옮겼다.
아직 남자들은 제초작업이 한창이었다.
우리는 새참으로 먹을 옥수수와 고구마를 삶아 놓고 쌀을 씻어 밥을 안쳐놓은 다음 농막 뒤켠 장독대에서 된장과 고추장을 퍼담았다.
장독대 바로 옆에는 대나무와 지푸라기로 엮은 작은 움집이 있었다
허리를 반쯤 구부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 커다란 장독 뚜껑 두 개가 나란히 덮여 있었다
뚜껑을 열고 두꺼운 비닐을 풀어 젖히자 시큼하게 익은 김장김치 냄새가 확 풍겼다.
박선배는 배추김치 두 포기를 꺼내어 큰 양푼에 담고 비닐을 비틀어 묶은 뒤 뚜껑을 닫았다
 
부엌으로 돌아온 박선배가 김장김치를 숭덩숭덩 썰어서 한 조각은 자기 입에 넣고 한 조각은 내 입에 넣어주었다
시큼한 냄새와는 달리 상큼하고 아삭거리는 김치 맛이 입맛을 돋우는 것 같았다.
아침에 커피 한잔 말고는 비어있던 위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거실 소파 옆에 정사각 교자상을 펴고 잘 삶아진 옥수수와 고구마를 쟁반에 수북히 담아 교자상 중앙에 놓았다
김치와 고구마를 곁들여 먹으면 환상일 것 같았다.
 
- 혜주야가서 애들 밥 먹자고 해지금까지 일하느라 배고프겠다.
 
과수원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보니 도로 쪽에서 보았던 것보다 사과나무는 훨씬 더 많았다
나무숲에 가려 璡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가지런하고 말끔하게 제초작업이 된 두둑을 따라 걷다 보니 저만치 일행이 보였다.
밭고랑에 쌓아놓은 베어진 잡초더미에서 특유의 풀 내음이 솔솔 풍겼다.
그것은 풋풋하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한 냄새였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과 친구들은 한 손에 낫을 잡고 열심히 풀을 베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내 발자국소리에 남자들이 일제히 일손을 멈추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습한 풀숲에서 허리 굽혀 낫질을 하느라 벌겋게 상기된 얼굴에 땀범벅이 된 남자들은 식사 준비가 되었다는 말에 반가운 표정으로 허리를 폈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싱긋 웃는 과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눈길이 피해졌다
나는 얼른 뒤돌아서 오던 길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璡 일행의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 잰걸음으로 농막을 향해 걸었다.
 
우리는 맛있는 점심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일몰 때까지 남자들은 제초작업을 하고 박선배랑 나는 농막 소파에 앉아 봉숭아 물을 들였다.
봉숭아 꽃과 이파리를 한 줌 따서 백반을 몇 개 넣은 뒤 콩콩 찧어 손톱에 바르고 비닐을 잘라 동여맸다
 
하룻밤을 지나야 진하게 물이 든다는데 겨우 반나절 만에 물이 들까?
그럼 우리 오늘 여기서 자고 갈까어차피 내일도 또 와야 하는데

박선배는 내일도 계속될 작업 때문에 하룻밤 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불편했다.
이미 오늘 하루 바람 쐰 것으로 휴식은 충분했고 璡 일행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