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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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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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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8-26

짙은 어둠은 말없이 바라보고 서있는 우리를 낮처럼 어색하게 하진 않았다
잘 가라든가 고마웠다든가 하는 인사를 건네야 할 텐데 
우린 서로가 먼저 작별인사를 해주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마간 어두컴컴한 대문 앞에 꼼짝 않고 서있었다서로의 시커먼 형체만 바라보면서
 
얼마쯤 지났을까
뒷집 박선배네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이 나자 우린 마치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처럼 숨소리도 죽인 채 대문 쪽으로 더 바짝 몸을 웅크려 붙였다
괜스레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 시간에 어두운 담 모퉁이에서 우리 집 쪽을 기웃거리는 걸로 보아 틀림없이 일 것이었다
인기척은 한동안 모퉁이에서 서성이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얼른 들어가요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요.
 
나는 허리께에 축 늘어져 있는 가죽가방 속에 손을 집어넣어 손끝 감각만으로 이리저리 뒤져 열쇠를 꺼냈다
그리곤 비밀의 문이라도 열 듯 가만가만 대문을 어루더듬어 열쇠구멍을 찾았다
찰칵하며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듯했다
혹시 대문 열리는 소리에 다시 이 나오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대문을 슬며시 밀어젖히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 다른 식구들은 없나 봐요?
 
그는 열려진 대문에 한 손을 짚은 채로 서서 불 꺼진 집안을 살피며 물었다.
 
들어가서 불부터 켜요대문은 내가 닫고 갈 테니.
 
텅 빈 집안에 혼자 들어가는 내 모습이 걱정스러웠는지 그는 내가 거실 등을 켤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거실에 이어 내 방에 불이 켜지는 순간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왠지 공허하게 들렸다.
커튼을 살짝 젖히고 대문 쪽을 살펴보았다
환영이었던 듯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암수의 잠금장치가 정확히 맞물린 철 대문이 그를 대신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참 이상한 날이었다
그를 만난 순간부터 헤어진 마지막 순간까지를 되짚어보니
그가 달콤한 말들로 분위기를 잡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와 사귀어볼 의향을 내비친 것도 아닌데 이제 막 시작되는 연인들의 데이트처럼 감미로운 느낌이 몽글몽글 솟아나는 듯했다
그에 대한 느낌이 좋았던 까닭은 누구처럼 나에 대해 집요하게 시시콜콜 알려 하지 않는다는 것무언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느낌이 있다는 것그리고 그도 나와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바로 그런 점들이 무뎌빠진 내 감정을 슬금슬금 움직이게 만든 것도 같았다
 
다음날 예상대로 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 대문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어제 오후 우리과 강의실에서부터 서성이다 돌아갔을 테고 
간밤 늦게까지 불이 켜지지 않은 내 방을 보며 그 시간 동안의 내 행적이 못내 궁금했을 것이다
나는 일부러 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늑장을 부리면서 첫 시간 강의가 끝날 무렵에야 집을 나섰다
 
골목에 들어서자 겨우 잎사귀 몇 개만 달랑 매달린 채 담벼락에 축 늘어져 있는 장미넝쿨이 보였다
간밤에 내 머리채를 낚아챘던 그 불한당이었다
김영규의 손에 의해 응징을 당한 꽃잎들은 이미 누군가의 발에 짓밟혀 뭉그러져 있었다
문득 어제 하루 동안의 일들이 아득한 기억처럼 하나 둘 떠올랐다
잘 가란 인사도 제대로 못했던 것
그리고 구두 수선비와 고무줄 냉면까지
 
본관 앞을 지나치면서 강의실로 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미 내 발걸음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왠지 수업에 출석한다는 것이 더는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말고사가 코앞인 도서관은 빈자리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수업을 들어가느라 비워놓은 자리들도 이미 주인이 있음을 경고하는 듯 저마다 가방이나 책이 올려져 있었다
한 사람을 찾기 위한 내 시선은 입구에서부터 한 칸 한 칸 좌우를 살피며 샅샅이 훑어 들어갔다
교련복이나 하늘색만 봐도 멈칫하는 내 기대와 달리 마지막 통로에 이르도록 김영규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듯도 하고 차라리 다행이다 싶기도 한알 수 없는 마음이 슬며시 들었다
그가 이 시간에 꼭 도서관에 있으란 법은 없지생각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無所有바로 그것이었다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 그것에 마음을 쓰게 되고 얽매이고 집착하기 때문에가지지 않음으로써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게 된다는 법정스님의 말씀
그리고 헛웃음이 났다
내가 지금 무엇에 마음을 쓰고 있는지
아무것도 가져서도 담아서도 안 되는 상황에 벌써 마음이 쓰여 가고 있다는 것이 예사로운 징조는 아니었다.
 
 
4교시까지 강의실에 나타나지 않는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순길과 유정이 점심시간을 틈타 도서관으로 찾아왔다
그렇잖아도 혼자서 잡념을 꾹꾹 다스려보는 참인데 그네들의 방문은 옥죄던 나의 숨통을 트여주는 탈출구 같았다.
 
왜 수업에 안 들어와다무르다무르이거 꼭 불어같이 느낌이 부드럽단 말이야다무르다무르…….
 
세상 걱정이라고는 없을 것처럼 언제나 쾌활한 유정이 도서관 계단을 내려오면서 줄곧 내 별명을 되씹었다
 
진이 형 때문에 그래?
 
잠자코 옆에서 걷던 순길은 내 표정에서 심각한 기운을 감지한 것인지 자꾸만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아니…….
그럼 왜 그러는데?
다음에 얘기해줄게넌 그 친구랑 잘 되가니?
그렇지 뭐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 온다.
 
미리 짜인 약속이었는지 모르지만 과 순길의 짝인 김동곤이 경상대에서 도서관으로 통하는 샛길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키에 비슷한 옷차림새까지 둘은 마치 한 쌍의 젓가락처럼 늘 붙어 다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건들건들 걷는 과 달리 김동곤은 대나무처럼 꼿꼿한 자세로 걷는다는 것이었다.
 
우리 점심 먹으러 갈 건데 형들도 같이 갈 거야?
 
제발 그냥 지나쳐주었으면 하는 내 바람도 몰라주고 유정이 기어코 사고를 쳤다
은 평소처럼 흔연스런 얼굴로 다가왔지만 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다행히 눈치 빠른 순길이 과 나 사이에 장벽이라도 치듯 내 팔짱을 끼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뒤따라오는 유정은 과 동곤 사이에서 무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쫑알대며 웃었다
 
우리는 학교 앞 단골 라면집으로 들어가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뒤따라 온 유정이 나와 순길의 맞은편에 앉고 유정의 옆에 동곤이 순길과 마주보며 앉았다은 옆자리 의자를 하나 가져와 탁자 모서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나마 마주보지 않아도 되는 자리인 게 다행이었다
주인은 찌그러진 알루미늄 양푼에 통째로 라면 5인분을 끓여 내왔다
라면을 먹는 내내 그들은 기말고사를 이슈로 삼아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꾸역꾸역 면발을 넘겼다
도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아서 어떤 표정으로 앉아 있는진 모르지만 와닿는 느낌이 부담스럽게 무거웠다.
 
어젯밤에 이어 연거푸 면으로 끼니를 떼운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어제 김영규와 불편하게 냉면을 먹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틀니 생각이 나 웃음이 났다.
 
다무르넌 이제 수업에 아주 안들어올거니?
 
나를 겨냥한 갑작스런 유정의 질문에 하마터면 목구멍을 넘어가던 면발을 내뱉을 뻔했다매콤한 라면국물이 기도로 들어갔는지 목구멍뿐 아니라 콧속까지 매운 기운이 얼얼하게 퍼졌다
캑캑거리는 내게 순길이 얼른 물 잔을 건넸다
 
어차피 다음 주 기말고사만 끝나면 방학이잖아.
 
순길은 눈물에 콧물까지 훌쩍이는 나를 대변이라도 하듯 유정에게 대꾸하며 내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점심식사 후 다시 학교로 들어온 우리는 본관 앞에서 각기 흩어지기로 했다
나는 혹시나 이 따라붙을까 싶어 서둘러 도서관으로 갔다
황급히 들어오느라 김영규를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오전 내 나의 두뇌 속 몰입과 잡념의 사이에서 씨름하던 책은 얌전히 덮인 채로 놓여있었다
나는 볼펜이 끼워져 있는 페이지를 열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정좌하고 앉았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이따금씩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하품소리그리고 방해가 되지 않으려 최대한 체중을 덜고 내딛는 조심스런 발걸음들을 촉각으로 느끼며 몇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내 앞자리에서 누군가 칸막이를 콕콕 쪼아대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짧게 들릴듯 말듯하여 그냥 넘겼으나 그 소리는 점점 신경을 거슬리게 잦아졌다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방법을 모색하려는 찰나 책상과 칸막이의 작은 틈새로 하얀 종이쪼가리가 슥 들이밀어졌다.
 
-좀 쉬었다 하지요-
 
낯익은 필체였다반갑기도 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까치발을 하고 칸막이 뒤를 넘어다보았다
김영규의 동그란 머리통이 보였다
그리고 반듯한 이마와 날렵한 콧등이
그는 펼쳐있던 책을 덮고 일어나 나가자는 고갯짓을 해보이고는 앞장서 통로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