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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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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9-06

이별의 순간을 잊기 위해 애써 딴청을 피우던 시간들이 후딱 달음질쳐 지나가고 한동안 말이 없던 김영규는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내 왼손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힘주어 감싸쥐었다
꽉 쥔 손아귀에 땀이 차오르고 아무런 말없이 앉아있는 순간에도 수많은 언어들이 공기처럼 언저리를 떠다니는 듯했다
내 숨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내가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널 믿어우리가 다시 만나야 하기 때문에라도 넌 잘 견뎌낼 거야그렇지?
 
살짝 떨리는 어조로 김영규가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많은 말들을 참아내는 듯이 보였다
내 손바닥을 엄지손톱으로 꾹꾹 눌러도 보고 손금을 따라 길게 그어보기도 하면서 몇 번인가 숨을 고르곤 했다
그러다가 가만히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의 갈색눈동자가 내 코앞에서 보여지는 순간 나는 눈을 감고 말았다
그에게서 늘 스치듯 맡아지던 싱그런 스킨 향과그만이 간직한그리고 나만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체취를 진하게 온 감각으로 받아들이면서 심장이 떨려왔다
 
타는 듯한 그의 입술이 가만가만 내 입술을 적시고 뭔가 모를 미묘한 파장이 내 안에서 일어날 즈음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가 슬며시 입술을 떼고 내 뺨 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양손으로 훔쳐냈다
아이를 다루듯 조심조심 눈물을 닦아내는 그의 손길에 더 설움이 돋았다
결국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고 마는 나를 꼭 감싸 안으며 그는 오래도록 입을 맞췄다
 
내 입술과 타인의 입술이 맞닿는 그 첫 느낌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가장 보드랍고 얇은 피부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성스럽고 고결한 교감을 위해 만들어준 것임에 분명했다
설레는 첫 키스를 김영규와 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눈을 뜨기 싫었다눈을 뜨면 따라오는 생각들이 두려워서였다.
늘 혼자였던 시간들을 그새 망각이라도 했던지 갑작스런 공허가 견딜 수 없는 무게로 덩어리져 달려들었다
앞산 중턱에 해가 차오를 때까지 침대에 누워 머리맡에서 째깍거리는 시계의 초침 소리를 듣고 있었다
차마 눈을 떠 시계를 바라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가 떠날 시간이 가까웠는지아니면 이미 떠났을지를 가늠하는 것이 두려워서 차라리 무의식의 상태로 있고 싶었다.
 
어차피 혼자였잖아이깟 허전함은 금방 사라질 거야하는 말들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자꾸만 되뇌며 다른 생각들의 침입을 막아내려 애를 썼다.
 
시간을 인지하는 감각기관과 헛된 싸움을 벌이며 한나절을 보내던 나의 지각을 일깨운 것은 박선배네 담장너머로부터 들려오는 기타소리였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했던 이 아직 뒷집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려주는 기타소리는 그때까지 기진해 있던 나의 심신을 한순간에 일깨우고 말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거실 커튼부터 살폈다어제 김영규가 꼭꼭 닫아놓은 그대로였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갑자기 나의 일상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라도 몸을 움직이기 위해 이불과 베개시트를 걷어 화장실로 가서 욕조에 물을 담고 세제를 부은 뒤 발로 꾹꾹 밟기 시작했다.
지난번 에게 사사로운 인연을 만들지 않겠다며 단호히 거절했던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지금의 내 상황이 화가 났다
김영규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면서 또 을 생각하면 나의 이중적인 태도가 못마땅한 것이 마치 이성과 감성이 줄다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복잡한 심사를 이불빨래에 화풀이라도 하는 듯이 발바닥에 힘을 주어 빨래를 밟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혹시 김영규인가 하는 잠깐의 기대가 있었지만 대문 앞에는 뜻밖의 손님들이 서 있었다.
엊그제 종강하던 날 조만간 집으로 찾아오겠다던 순길의 언질이 있었던 터라 순길의 방문은 예상했지만 나랑 개인적인 친분이 없던 민주가 함께 동행한 것은 뜻밖이었다.
 
약간의 어색함은 있었지만 순길 덕분에 우리는 금세 편안한 분위기가 되었고 민주가 우리과 수석을 한 친구라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학기 초에 입학처로부터 내가 과 차석을 해서 장학금이 지급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문득 수석을 한 친구가 누구인지 궁금하기는 했었다.
순길은 그래도 우리과에서 공부 좀 하는 친구끼리 의기투합해서 좋은 학교로 진학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리 둘을 꼭 연결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민주는 서울대 법학과를 지망했다 낙방하고 우리 학교에 온 친구였다
아담한 키또렷한 눈망울항상 단정한 옷차림에 스니커즈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딱 봐도 학구파일 듯한 외모였고 늘 강의실 맨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있는 친구였다.
학과에서 누구랑 어울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나 못지않게 외톨이 생활을 하는 것 같았는데 순길과 함께 우리 집을 방문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민주 또한 내가 차석이라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왕발이 친구인 순길의 정보력에 의한 것이었고 당사자인 민주와 나를 제외한 학과생들은 이미 알고 있는 공공연한 내용이었다.
민주는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성적이 늘 상위권이었고 아버지가 변호사인 법조계 집안의 무남독녀였다
민주에게 거는 부모님의 기대치도 상당했고 그에 따른 그녀의 좌절도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았다.
민주는 체구는 작지만 욕심도 많고 야무진 친구였다
그녀는 비록 언젠가 떠날 학교이지만 이곳에서의 성적관리도 소홀하지 않았고 지난 중간고사에서는 우리 과 TOP을 차지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그런 강단 있는 모습이 부러우면서 뭔지 모를 연민이 느껴졌다.
우리는 마치 삼국지의 유비관우장비가 도원결의를 맺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채찍과 당근이 되어주자는 다짐을 했다
 
민주가 다른 일정으로 먼저 자리를 뜨고 나자 순길은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할 태세로 내 앞에 마주 앉았다.
- 종강하던 날 상징탑 아래에서 동곤이랑 앉아 있었자나그때 양진이랑 너 남자친구 이야기 들었어혜주 너한테 나 무지 섭섭해그래도 나는 너랑 여고동창이고 같은 과 동기라 너랑 친하다 생각했는데 어떻게 남자친구 생긴 이야기를 나한테 한번도 안해줄 수 있어그날 너랑 같이 교문으로 나가던 그 친구가 맞지?

그날 김영규가 자퇴를 하고 함께 교문을 나설 때 상징탑 아래 잔디밭에 순길과 동곤이 앉아있는 걸 보았고 늘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이 보이지 않는 것이 잠깐 이상하긴 했었다.
 
- 양진이 김동곤한테 둘이서 만난 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동곤이 나한테 말해줬어
- 그래서 그 두사람이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대설마 싸우지는 않았겠지?
- 그 공대생 친구가 혜주는 내 여자친구니 집적대지 말아 달라는 식으로 정중하게 요구했는데 양진이 거부했다드라뭐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들어가냐면서누가 승자가 될지 해보자는 식으로 말했대넌 어때나는 니 생각이 궁금한데?
 
순길의 말을 듣고 나니 김영규가 왜 함께 올라가자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가 얼마나 불편한 마음으로 떠났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그리고 의 그 알 수 없는 자신감과 억지스러움에 화가 치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