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07

마흔 넷 2


BY 인 연 2004-10-22

마흔 넷 2

나는 매일 침대 옆 탁자 위에 작은 액자를 바라보며 깨어나고 잠이 듭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니 이제는 습관처럼, 버릇처럼 시도 때도 없이 눈길이 
머뭅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랬습니다.
액자 속에 모여 앉은 예슬이, 예총이 그리고 선자 당신의 잔잔한 미소가 정겹습니다.
선자.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입니다.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본이나 인감증명을 발급받을 때나 한 두 번 불러보았거나 가끔 
배달되는 우편물에서 낯선 얼굴을 보는 듯 무심코 읽었던 이름이었는데 아직도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용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신선 仙자에 아들 子를 쓰지요. 本은 경주 金씨라는 것도 기억합니다.
나는 남자도 아닌 당신이 왜 신선 仙자를 썼는지 늘 궁금했답니다. 
당신은 부모님께 전해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아니 물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과 결혼한 것이 아니었기에.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결혼을 하고서 당신에게 또 다른 이름이 두 개나 더 생겼기 
때문입니다. 신혼 때는 여보! 당신! 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이름을 얻었지요. 
하지만 왠지 낯설고 쑥스러워서 나는 제대로 불러 보지도 못하고 그 것들을 망각의 
창고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연예할 때 가끔 쓰던 자기라는 말로 대신했지만 그것 또한 낯 간지러운 일이었지요.
하는 수없이 나는 당신의 배가 부를 즈음 아이이름을 짓고 그 옆에 엄마라는 명사를 
덧붙였습니다. 
당신은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면서 이름을 먼저 지으면 어떡하느냐며 볼록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엷은 미소를 띠었고 그 미소 속에 싫지 않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 때 난 확신했습니다. 첫딸은 살림밑천이라는데 당신 뱃속에는 틀림없이 딸아이가 
들어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예쁘고 슬기롭게 자라라며 예슬이라는 이름지었고 둘째는 
사내아이이길 바라며 예쁘고 총명하게 자라라고 미리 예총이라 지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얻은 당신의 이름이 예슬이엄마, 예총이엄마였고 그 때부터 선자라는 
이름은 기억 속에서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부부는 17년 가까이 한 이불을 덮고 살아오면서도 서로의 이름 
한 번 제대로 불러 본적이 없었습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본명도, 예명도, 별명도 넉살스럽게 잘도 부르는데 우리는 왜 
아직도 본명을 부르는 것조차 쑥스러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같은 중년부부들이 서로를 향해 여보! 당신! 부르고 외칠 때면 때론 
부럽습니다.

사진 속에 예슬이, 예총이가 너무나 의젓해 보입니다. 이젠 다 키웠네요.
언제 이렇게 컸는지 어릴 적을 생각하면 격세지감世之感을 느낌니다.
어린 코흘리개를 시골에 사시던 장모님께 맡겨 두고 상경할 때 우리부부는 예슬에게 
까까를 사가지고 오겠다고 거짓말을 했었지요.
때구정물같은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울던 예슬이는 까까라는 말에 눈물을 멈추었고 
외할머니 품에 안겨 서울로 떠나는 우리부부를 향해 목화송이같은 손을 셀 수도 없이 
흔들었습니다.
고속버스에 오른 당신은 뒷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손수건이 흥건하도록 눈물만 
흘렸지요. 
그 날 어린 예슬이가 까까를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돌아오지 않는 엄마아빠를 얼마나 
원망했을까요. 꿈속에서도 기다림에 지치고 또 지쳤을 것입니다.
고속버스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부부는 죄인처럼 침묵했고 나는 가슴이 미어져 
당신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못한 채 차창에 매달려 동승한 바람소리만 빈 가슴에 담고 
또 담았습니다.
몇 달 후 다시 시골을 갔을 때 대문밖 골목길에서 소꿉놀이를 하던 예슬이가 우리를 
보고 넘어질 듯하면서 용하게도 안 넘어지고 달려오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서 벌어진 
듯 생생합니다.
내 품에 안겨 부끄러워하던 예슬이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아침이슬처럼 
어찌나 영롱하던지, 갑자기 당신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예총이 녀석은 잦은 병치레로 만만치 않았지요.
그 어린 녀석이 감기를 일 년이면 365일을 달고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백설기처럼 하얀 얼굴은 눈물과 콧물 때문에 빨갛게 변했고 기침 때문에 손수건을 
목에 감았지만 예총이는 신기할 정도로 잘 참았지요.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다가 잠이 들면 녀석은 꿍꿍 앓았지만 한밤중에는 깨어나서 
울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어느 날 녀석의 감기는 폐렴으로 변하여 말았지요.
늦은 저녁 당신의 전화를 받고 달려간 병실에서 난 잠시 할말을 잃었습니다. 
침대에서 잠든 예총이의 눈은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있었고 손에 감긴 붕대에는 
아직 마르지 않는 피가 흥건하게 배어 들었으며 솜털같은 머리카락을 헤치고 뜨개질
바늘처럼 큰 주사기가 꽂혀 있었습니다. 
당신은 몹시 피곤했는지 침대에 머리를 기대어 졸고 있었답니다. 
아이의 아픔을 대신하지 못해 지쳐 쓰러진 당신을 보면서 이제야 미안한 마음으로 
고백하지만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예총이는 어릴 적 나를 닮아서 두드러기도 참 많이 났었지요. 녀석의 두드러기를 
볼 때마다 부전자전이란 말이 실감났습니다. 
내가 어릴 적 두드러기가 나면 아버지는 탱자나무열매를 까서 등을 문질러 주었는데
그 때마다 살갗을 벗겨 내는 듯한 쓰라림이 온몸을 전율케 하였습니다.
말이 민간요법이지 저에게는 고문이었습니다. 당해 본 사람만 압니다.
그래서 찬바람을 쐬며 밖에서 놀다가도 두드러기가 나면 군데군데 돋은 피부가 
가라앉을 때까지 집에도 들어가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탱자열매의 효과는 상당했습니다. 쓰라림의 아픔이 지나면 몸도 시원해지면서 
두드러기도 씻는 듯이 사라졌습니다.
예총이가 두드러기증상이 있을 줄 미리 알았더라면 탱자 좀 준비해 놓을 걸 그랬죠.
아빠의 어릴 적 고통을 조금이라도 체험할 수 있도록.
약간의 아쉬움은 남지만 예총이가 중병은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다 당신의 정성 어린 
보살핌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중에 굽은 나무가 선산先山을 지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묘소에 심은 나무들은 세월이 흘러 곧게 뻗으면 목재로 쓰기위해 다 베어지지만 
못생기고 구부러진 나무는 톱날을 피할 수있어 오랫동안 조상의 묘를 지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슬, 예총이는 이름처럼 예쁘고 슬기롭지도, 총명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특별한 소질도 없어 앞으로도 크게 두각을 나타낼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뛰어나지만 그 잘난 것을 빙자하여 부모 속을 썩이는 자식보다는 백배는 더 사랑스럽습니다. 옛말에 어릴 적 부모의 발꿈치를 밟는 자식은 커서 부모의 가슴을 밟는다 하였습니다. 버릇없이 키운 자식은 장차 커서 자신의 욕심 때문에 부모의 가슴에 흉기를 들이대는 패륜아가 될 수있다는 것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인간은 가족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태아는 엄마의 뱃속에서 탯줄을 의지하여 10개월을 살다가 세상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 태아가 세상에 나오면 엄마 품을 의지 삼아 성년成年이 되며 그 성년은 배우자를 의지하고 노인이 되면 자식을 의지하다 인생을 마감합니다. 나름대로 반듯하게 키웠다는 자식들이 오히려 늙은 부모를 멀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음속깊이 새겨집니다. 사진 속에 예슬이는 벌써 고등학생이 되어 어엿한 숙녀의 모습이 투영되기 시작하고 예총이는 중학생인데도 내 키보다 커버렸습니다. 불과 일 년 전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세월이 유수같은 것이 아니라 인생이 유수와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한국을 떠나던 날 나는 당신과 아이들이 남기고 간 옷과 물건들을 남김없이 버렸습니다. 텅 빈 집안에서 당신과 아이들의 물건이 눈에 밟히면 미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향취가 느껴질까 봐 안방 침대에는 일 년 동안 얼씬도 하지 못했습니다. 집안에 남은 당신과 아이들의 흔적은 거실 벽에 걸린 작은 사진액자뿐이었습니다. 예슬이가 쓰던 방에서 달팽이처럼 몸을 말고 잠이 들 때마다 가족의 얼굴이 눈꺼풀에 붙어 있는 듯하여 밤새 뒤척였습니다. 어쩌다 새벽에 잠이 깨면 나도 모르게 당신의 빈자리를 쓰다듬었습니다. 그 때마다 공허함의 끝을 느꼈습니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너무 무서워서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컴퓨터를 켜고 텔레비전을 켜는 버릇도 생겼습니다. 내가 일 년 동안 깨달은 것은 외로움보다 그리움이 더 무섭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자. 사진 속에 당신의 미소는 아직도 아름답습니다. 잘게 말린 파마머리는 조금은 거슬리지만 그런 대로 봐 줄만합니다. 화장하는 나이를 지나 위장하고, 변장하고, 포장까지 해야 하는 나이가 될지언정 당신의 미소는 지금처럼 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 낡은 사진첩을 정리하는데 당신과 내가 갈대밭에서 활짝 웃는 사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모습은 일류 모델보다 아름다웠습니다. 부디 그 미소를 생이 다하는 날까지 간직하여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유산으로 남겨지길 기대합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불려지지 않았지만 이름이 많은 당신. 미국에 와서 이름이 하나 더 늘었더군요. 리사라고 했던가요. 탁자에 놓인 주급봉투에 탱큐! 리사라고 적힌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름이 있었는데도 제대로 한 번 불러주지도 못하고 항상 눈빛으로만 당신을 불렀던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떡하지요. 앞으로도 이 버릇은 쉬 고쳐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선자가 되든, 리사가 되든 당신의 이름 하나가 세상에 널리 불려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당신과 아이들 모습에서 엷은 외로움이 묻어 납니다. 낯선 타국에서 내가 빠진 채 찍은 사진이라서 그럴까요. 엇 그제 컴퓨터 모니터 머리를 박고 무언가를 논의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외로움은 앞모습보다 뒷모습에서 더 묻어 나기 마련인데 아이들의 등은 당신의 등보다 훨씬 넓어 보였고 외로움도 더 이상 묻어 나지 않았습니다. 땅거미가 발목까지 잠겨 오는 저녁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살지는 못하지만 미소와 웃음만큼은 풍성하여 항상 창 밖까지
넘쳐 나는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 . 뉴저지 포트리에서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