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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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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부


BY 조 양희 2014-12-30

그녀는 참으로 얼굴은 박색인 편이다.

 

그러나 그녀를 내칠수없는 인간미가 느껴졌다.

 

그나마 늘씬한 몸매하나는 타고났다.

 

그녀는 아들하나를 군대보내놓고 그아들이 제대할때까지만 이일을

 

해서 그나마 아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했다.

 

그녀이름은 수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녀는 중학교 3학년때에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고 그사실을 안 친모는

 

의붓아버지와 헤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녀는 친모의 지인을 통해 서울에 식모로 보내졌다한다.

 

식모로 보내놓고 일년치 월급을 미리 받아갔다고 하니 팔아먹은것이나 다를바가 없다.

 

세상엔 그렇게 사람같지 않은 부모들도 존재하고 있다.

 

그렇게 일년이 이년되고 이년이 삼년되기를 거의 십년세월을...

 

그렇게 그녀는 중졸만 겨우하고 식모로 꽃다운 청춘을 다 보냈다고한다.

 

그녀는 한 5년이 될때까지도 돈한푼 만져보지 못하고 그렇게 식모노릇만했다.

 

그 돈은 울산에 있는 그녀의 친모가 매년 꼬박꼬박 남겨진 남동생둘과의 생활비

 

명분으로 받아갔다고 한다.

 

철없던 그녀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시장이라도 가다보면 교복입고 다니는 또래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식모로 생활하는중 다행히도 주인아주머니가 그녀를 가엾이 여겨 잘 대해줬다고 한다.

 

그 주인의 배려로 언젠가부터 그녀는 노동의댓가를 직접 관리할수 있었다.

 

숙식을 해결하니 별로 돈 쓸일도 없었고 그녀는 학교를 가 보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저축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자주다니던 동네 슈퍼마켓 아주머니의 중매로 남편을 만났다.

 

순박해보이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몇달을 교재를 하다가 학교복학 대신에 그녀는 그를 선택했다.

 

그녀와 그는  정식으로 결혼식은 올리지는 못했어도, 아니 그 비용이 아까워서

 

둘이서 사진관에가서 사진한장을 찍고 혼인신고를 하고 그렇게 살았다.

 

모아두었던 돈과 주인 아주머니의 배려로 전셋방도 얻었다.

 

비록 단칸방이긴 했지만....

 

남편은 성실했고 그녀도 배운것이 식모일이니 파출부 생활을 하며

 

나름 행복했다.

 

둘이서 맞벌이로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미래가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는 세월중에 임신을 했고 아들을 낳았다.

 

남편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누님이랑 살다가 그녀와 결혼을 한것이다.

 

양가 모두가 찢어지게 가난한 가족들이였다.

 

그녀는 친정과는 인연을 끊고 살고 있으며 아들과 남편과 행복했다.

 

자식에게 가난의 대물림은 주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살고 있을즈음 남편의 감기가

 

좀 오래간다라고 생각하며 병원에 갔는데 폐암으로 판정을 받았다.

 

그때 그녀나이 겨우 서른다섯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이였다.

 

남편을 살리고자 그동안 피땀흘려 모은돈을 홀라당 병원비에 다 쏟아붓고

 

그마저도 모자라서 억척같이 해서 얻은 21평의 아파트마저 팔고 아들과 그녀는 병원근처

 

고시텔에 기거를 하며 남편 병수발을 했건만 남편은 그녀와 아들만이 남겨둔채로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녀에게 남은건 밀린 병원비뿐...

 

장례식도 겨우 치뤘다고 한다.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다시금 입주식식모살이를 선택했고 고맙게도 그녀의 아들은 반듯하게

 

자라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에게 항상 미안했다.

 

식모아들이란 수식어를 붙게  만드는게 늘 미안했다.

 

그래서 아들이 예민할 사춘기 시절에 아들을 데리고 나와서 그녀는 여러가지 행상도 해보고

 

간간히 파출부일도 해가면서 쉼없이 부지런히 살았다.

 

이곳저곳에서 서빙도 해가며 아들의 뒷바라지를 했고 아들은 대학까지 나왔다.

 

그런 아들이 군대엘 갔다.

 

아무리 악착같이 살아도 여자의 벌이에 한계를 느꼈고 가난의 굴레는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아들이 없는 삼년동안만이라도 열심히 벌어서 아들이 제대를 하면 식당이라도

 

하나 해봐야겠다는 각오로 덤벼든것이다.

 

얼마나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를 그녀의 거북이 등짝과도 같은 손이 대신 말해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 나이에 어느곳엘 가도 이 시급을 받을 수 없다며 하루에 한방이라도 감사히

 

생각하겠다며 내눈을 쳐다보며 말하는 그녀를 냉정히 뿌리치지 못했다.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 했던가?

 

그녀는 생각외로 일에 적응을 잘 해나갔다.

 

살아야겠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필사적이 몸부림 탓인지 그녀는 정말 아들이 제대함과

 

동시에 이일을 관뒀고 지금은 부산동래에서 갈비집을 운영하고 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들 말은 하지만 분명히 귀천이 있다라는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어떻게 버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건 어떻게 쓰는냐인것같다.

 

또 어떤곳에 몸을 담고 있냐보다는 그 사람의 의식이 중요하다라는것을 나는 그녀를 보며

 

느꼈다.그녀는 아마도 앞으로도 밝은 미래가 보장되리라 믿는다.

 

무엇을 해도 성공할 사람으로 내겐 비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