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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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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거


BY 솔바람소리 2025-08-05

칩거

                                                            *2년전 그린 그림.



눈을 떴다. 하루를 또 살아내야 하는구나. 무엇을 하며? 자문에 선뜻 떠오르는
답이 없었다. 무기력한 하루를 보냈던 밤이지만 잠들 시간에 잠자리에 눕는 것은
당연한 거잖아. 백수 생활하며 제일 떳떳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매일 밤 난 왜 지쳐있는 걸까?
쉬고 싶어서 쉬고 있는데 마음은 여전히 혹한의 겨울이나 이글거리는
뙤약볕 공사판에 놓인 잡부만 같다. 또 겨우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만드는 것 외에
온통 무명천에 몸이 감긴 미라와 같이 자유로운 육신으로도 꼼짝 않고 싶었다.
오리탕, 갈비탕, 김치찌개, 얼큰 콩나물 어묵국, 부추도토리전, 꽈리고추멸치감자조림,
노각무침, 오이지무침, 묵은지 무침, 고구마스프, 소고기 장조림등 무엇을 만들어 놓았는지
모를 정도로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을 김치냉장고가 빼곡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내 입으로
집어넣기는 귀찮았다. 딸이 오지 않는 한 접시에 덜어내지 않고 그중 보이는 몇 개의 반찬을
꺼내어 한데 비벼 먹기 일쑤다. 맛을 느끼는 감각 따위 무시됐다.
 
책을 펼쳤다. 몇 줄의 활자를 읽어 내려갔지만, 문득 뭘 읽었지? 반복해서 
읽기를 또 여러 번. 그러다 문득 생각났을 때 해야 할 다른 일거리가 생각나서 
묵직한 엉덩이를 떼고 움직여야만 했다. 그 짓 하기를 또 여러 번. 유레카! 내게 
ADHD가 있었구나! 요즘 발견한 증상이다. 불면증과 우울증에 그것까지. 
얼씨구, 지화자가 아니 수 없다.
며칠째 밖을 안 나갔지? 이러다 황인 족에서 백인 족으로 유전자 변형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히키코모리가 되려나?
넘쳐나는 시간을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마구 쏟아 버리는 중이다. 아깝지만 요즘
속수무책이다.

칩거 내게도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어린 날의 기억은 술에 취한 아빠의 횡포와 지켜 줘야 할 남동생 둘과 불쌍한 
엄마의 고통과 눈물이, 또 고장 난 육체에 잦은 병치레를 겪는 내가 있었다.
나는 거친 입을 가졌고 집에서 끙끙 앓을지언정 총, 칼싸움에 있어서 밀리지 않는 
저돌적 성향을 지녔던 머슴아같은 그런 바닷가 소녀였다.
어울리지 않게 난 인형을 좋아했다. 동물 캐릭터 인형도 좋았지만 바비인형과 같이
내가 소유하지 못한 몸매가 예쁜 인형을 좋아했다. 그 인형에게 어울리는 옷을 코디해서 
입히는 것을 즐겼다. 인형 선물을 받은 날은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한 양 행복했다. 
마을의 친구나 언니들이 입 벌리며 부러워할 정도로 펼쳐 놓으면 방안 가득했던 인형과 
옷들이 있었다. 새로운 인형과 옷을 얻을 때마다 여운이 길지는 않았지만 행복했다.
엄마는 내게 수원 사는 이모에게 부탁해서 시골에서 흔치 않은 원피스나 구두를 구입해서
입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빠가 선물해줬던 손목시계는 전교생 중 유일한 거였다.
누룽지나 앵두같은 간식을 챙겨왔던 친구들 속에서 내 가방 안에는 늘 하루 지난 빵을 
차편으로 보냈던 제과점 이모 덕에 크림빵과 소브로, 맘모스, 시나몬이나 롤케잌 등으로
가득했다. 전기밥솥에서 생긴 적 없던 누릉지와 바꿔 먹던 소소한 행복도 있었다.
하지만 나를 저주받고 태어난 세상 불행한 주인공이라고 여겼다. 아빠의 폭력에 노출됐던 
엄마와 바로 밑에 남동생이 또다시 당할 것이 늘 두려웠다. 내가 맞은 것처럼 아팠다.
칩거가정을 꾸리며 느꼈던 행복은, 내게 태어난 아이들이 훤칠하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던 것 같다. 그 아이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면 ‘엄마는 세상 제일 요리사’
라며 엄지손가락 세워주던 모습이 암흑의 지옥 속을 뚫고 들어왔던 별빛의 작은 희망의
빛줄기였다. 그리고 숨쉬기 의해 썼던 글들이 방송국이나 공모전에 채택되고 어느 사이트에서 베스트 작가상을 수상하며 방송국이나 지역신문에서 인터뷰를 했을 때나 책을 출간했을 때도 뭐가 된 듯 우쭐했지만 미친년처럼 마냥은 아니었다.
일관성 있게 변함없던 건 심적으로 여전히 나는 세상 속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칩거 현재의 행복은......
짜임새 있는 시간표에 얽매인 듯 안팎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빴던, 24시간이 부족하기만
했던 시간이 당장은 내 주변에 널부러져 있을 정도로 풍족해졌다는 것. 더이상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어졌다는 정도. 전화가 오는 등, 칩거한 내게 여전히 세간의 방해는 
있지만, 침대에서 시체놀이가 가능해졌다. 광합성이 부족한 듯하여 어쩌면 조만간 찜통 
더위에 맞서며 밖을 나선 뒤 나무토막처럼 한 곳에 자리하고 앉아 있을까 계획 중이다. 
발에서 뿌리가 내리고 머리에 가지가 생기고 싹을 틔운 나무가 되어 새들의 집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난 ADHD가 있었지. 뿌리 내리려다가도 공사판의 잡부처럼 
바쁜 생각들만으로 치어서 지쳐 버리는... 당장은 어느 곳에 진득하니 뿌리 내리지 못하는
그런 인간이 되었지. 
 
하지만...
 
한 발 내딛는 걸음이 묵직한 것이 보이니?
중력이 내게 쏠린 듯 떼어내기가 어려워.
그래서 들렸던 걸까?
작은 이름 모를 야생초가 내게 말했어.
‘난 돌 틈을 뚫고 나왔어. 엄살 부리지 마.’
날 조롱하는 소리가 들렸어.
비웃음거리는 되지 말아야지.
난 그래도 나름은 힘껏 나가고 있는 중이야.
곧 가속이 붙을 테니 지켜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