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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동기부여(8)-마무리


BY 솔바람소리 2025-07-24

아들은 계약해 놓았던 곳으로 이사한 후 연미오빠에게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그들과의 연락은 끊은 듯했지만, 여전히 연미를 떠나보내지 못했다. 
정신과 약을 먹고 겨우 잠이 들면 꿈인지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연미를 만난다고 
했다. 깰 때까지 연미와 함께 일상생활을 하거나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차라리 생전에 일부처럼 안 좋은 모습을 보였다면 정 떼기가 수월할 텐데 잠자리에 
들어서 볼 수 있다던 연미는 배려심이 넘치는 착하고 예쁜 모습으로 아들을 대한다고
했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고 했다. 깨어난 아들은 연미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그리고 앞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괴로워했다. 지켜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스님을 
통해서 천도 제를 지냈다. 아들과 스님과의 대화 자리를 자주 만들기도 했다.
점차 아들의 꿈에서 연미의 등장은 잦아들었고 등장해도 화를 내거나 트집을 잡는 등,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거나 연미가 냉정하게 뒤돌아서서 떠나는 것을 본다고 했다. 
아들은 아쉬워했지만 내게는 다행이었다. 시간이 약이다, 하루라도 빨리 시간이 지나길 
바랬다. 
 
”엄마, 저는 죽을 수 없어요. 악착같이 살 거예요.“
연미가 떠난 후 아들이 자주 했던 말이다. 그 말은 들을 때마다 칼에 베인 듯 쓰리고 
아팠다. 그리고 주어진 일상을 보내면 그만인 것을 악착같이 살겠다는 각오로 대한다는 
그 말이 세상 떠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다는 듯, 역설적으로 들렸기 때문에 두려웠다. 
 
내 자식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겨 준 나는 한때 자살을 여러 번 시도했다.
무책임했던 애들 아빠는 나의 사회생활을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어린 자식들과
생활비는 대부분 내가 책임지게 했다. 한계를 벗어난 결혼생활은 지옥이라는 단어로도 
표현이 부족했다. 천덕꾸러기 되기 십상의 아이들과 함께 갈 곳이 없었다. 반대를 
무릅쓴 나의 선택이었기에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벼랑 끝에 사지가 묶인 듯 옴짝달싹할 수 없는 막다른 기분이었다. 동거 초반에 –아들이 
4살 무렵 동성동본규제가 잠시 풀렸을 때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었다. 그해 아빠의 허락을
받고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걸음마 뗀 아들을 두고 집을 나간 적이 있었다. 이틀 
만에 봤던 아들은 3째 형님댁에 맡겨진 채 그새 거지꼴이 되어있었다. 그 후 혼자서 
떠난다고 해서 잘 살아 낼 자신을 잃었다. 점점 애들 아빠의 밑바닥을 대할 때마다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라 여겨졌다. 손목을 그어봤다. 살던 집이나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약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몸에 이상만 남겼을 뿐 매번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었다. 그런 나를 대하던 스님이 어느 날 안타까워하며 말씀하셨다.
 
‘애들이 받은 상처 어찌 감당하려고 이래요, 보살님. 이거 다 업 짓는 거예요.’
 
하지만 억울하기만 했던 내 귀에 와닿지 않았다. 
 
포교원을 하시던 스님이 삶을 포기했던 내게 큰 스님과의 만남을 주선하셨다. 그날 
처음 뵙던 큰 스님께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귓등으로만 듣던 내게 얼굴을 붉히게
했던 질문을 하셨다. 
 
‘보살님은 태어나서 해 놓은 것이 무엇인가요?’
‘태어나서 지금껏 벌려 놓기만 했지. 책임진 것 하나 없는 것이 비겁하게 혼자 도망
치겠다고?’ 꾸중하시는 듯했다.
-그날 큰 스님께서 내 앞에 놓으셨던 넘칠 듯 가득 채우셨던 물이 담긴 투박한 도자기 
컵과 함께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어제 들었던 것처럼 지금껏 그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족쇄로 여겨졌던 어린 자식들만 남겨 두고서 떠나려던 내 비겁함을 꾸짖는 듯 부끄러웠다. 
그날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미로서 책임은 다하자, 그날 이후 자살 충동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거나 실행한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큰 스님께서 비우라 하셨던 마음을 여전히 넘칠 듯 가득 채워진 컵으로 살며
주워 담지 못할 것들을 그리워하는 듯하다.
 
연미는 자신의 신체적인 병과 결함에 대해서 치료를 도왔고 그 외 버킷리스트를 이뤄주고자 
공휴일에도 일손을 놓지 않았던 책임감 있는 사랑하던 아들을 곁에 두고서 왜 떠난 걸까.
아들이 연미에게 서른이 되도록 혼인 신고와 아이 갖는 것을 보류하자고 제한했던 것을 
시간이 갈수록 심하게 트집 잡았다고 했다. 
엄마와 연을 끊은 아들이 엄마의 뜻을 완전히 꺾어내지 않아서?
아니면 결국은 나와 마주하게 될 미래가 두려워서...........?
내 앞에 둘이 예쁘게 살아온 모습을 갖추고 당당히 나타날 자신은 없던 걸까?
그것이 싫었다면 살아서 이별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는 없던 걸까? 
아이가 없었고 법적으로도 문제 될 것도 없었으니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흠이 될 
부분이 없었다. 어린 날부터 혈육의 도움 없이 홀로 살아냈던 것처럼 당차게 살아냈어야 
했다. 그 애는 무엇이 그토록 내가 지녔던 마음처럼 절벽에 사지가 묶인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마음을 갖게 했던 걸까.
 
애들이 받은 상처를 어찌 감당하려고 하냐 던, 흘려버렸던 스님의 말씀이 아들이 나의 
지난 잘못을 끄집어낼 때마다 떠올리게 되었다. 이제 자신은 악착같이 살아 낼 거라는 
아들의 말 속에 ‘엄마나 연미와 달리’라는 차마 뱉지 못한 말이 들린 듯했다. 
많이 늦었지만, 아들에게 어리석고 비겁했던 어미를 용서하라는 말을 여러 번 진심 담아 
사과했다. 나와 달리 현명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함께 붙였다.
어느 날 아들이 물었다.
”엄마, 타임머신을 타고 저를 가진 것을 알게 된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엄마는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
유아적인 질문에 대답했다.
”타임머신을 이용할 수 있다면 네 아빠와의 만남 전으로 돌아가서 어떻게든 피하는 
방법을 찾겠지만, 너를 임신한 걸 알았던 순간으로만 돌아가야 한다면 똑같이 너를 
낳는 방법을 택했을 거야. 그리고 조금 더 현명한 방법으로 이혼하겠지.“
”엄마는 아빠가 아직도 싫으세요?“
 
-애들 아빠는 아들을 폭력적으로 대하지는 않았지만 딸을 대한 것과 달리 데리고 들어 
온 자식처럼 함께 목욕탕을 다닌다거나 씻긴 적이 없었고 거친 말로 이것저것 부리기만 
했다. 모순되게도 이혼 앞에서 아들은 제 아빠를 안쓰럽게 여겼고 딸은 나의 어떤 회유에도
지금껏 제게는 아빠가 없다고 여기는 중이다. 천륜을 저버리려는 딸에게 뒤늦게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미의 삶을 지켜본 탓인지 딸은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를 편한
마음으로 대하지 못했다. 언젠가 자신에게는 똥파리만 꼬이는 것 같다는, 예전에 내가 
떠올렸던 말을 했다. 모든 것이 나의 영향인 듯 죄책감이 든다. -
 
”아무 감정 없어. 네 아빠도 엄마보다 온순하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났더라면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지. 우린 서로에게 자질이 부족했어. 진심으로 네 아빠가 잘 
살았으면 해.“
아들의 질문에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대답했다.
”엄마는 항상 최선을 다해서 저희를 키우셨어요. 여자 힘으로 혼자서 힘드셨을 텐데...
나이가 들수록 엄마가 대단하셨구나, 생각하게 돼요. 이제는 미안하단 생각하지 마세요. 
엄마를 이해해요,“
아들의 대답이 있었지만, 나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린 날 가졌던 각인 된 상처는 쉽사리
 잊히질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내가 그랬듯 ‘그럴 수도 있었겠다.’ 이해됐던 마음처럼 하루
빨리 아들도 그렇게 편해졌으면 한다.

아들은 연미를 보내며 들었던 장례비나 화장비, 수목장비용, 연미의 대출금, 그리고
아들 앞으로 들었던 대출까지 갚아야 할 금액이 제법 큰 듯했다. 빚에 쫓기던 아들의 
부탁으로 몇 번 돈을 보태주기도 했다. 얼마의 빚이 남았냐는 질문에 확실히 대답하지 
못했던 아들은 지금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빚을 상환 중이라고 했다. 
이직한 직장에선 1년 이상 견디기 어려워하던 아들이 나의 반대에도 지인과 동업을 
시작한 지 1년이 되어 가는 듯하다. 연미와의 일을 고해성사하듯 이성을 대할 때 
고백한다던 아들은 함께 수목장까지 다녀왔다는 한 여자와 1년 이상 만나는 듯했지만 
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두렵다더니 결국, 헤어졌다고 했다. 반년 전 자주 돈을 부탁하던 
아들에게 더는 여윳돈이 없다고 했다. 그 후 아들에게 가물에 콩 나듯 간혹 연락이 올 
뿐이다. 큰 고비를 겪었던 아들의 미래만큼은 순탄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하는 
마음이다. 
 
한때는 혼자 굳건히 지켜냈던 자식들을 성장시키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자부했던 삶이었다. 요즘은 아들의 연락이 두려운, 자랑은커녕 맘 편히 말을 
꺼낼 곳이 없는 엄마라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흰머리 성성한 등이 굽은 노인이 자신의 키를 넘어선 리어카를 끌고 가는 모습에서,
계단의 시멘트 틈새를 비집고 나오던 작은 식물의 노력 앞에, 뙤약볕에 노출되어 땀 흘리는 
노동자의 하루를 지켜보며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마음이었다. 하지만 현재
부쩍 삶에 지치고 무기력해진 나를 대하게 됐다. 길을 잃은 듯 이제는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오른손가락 골절 후 오롯이 혼자서 씻고 밥을 해 먹고 청소를 하는 생활을 하면서 
무심했던 자식들을 보게 되었다. 엄마인 나는 자식들에게 단지 아쉬울 때만 찾는 
존재였구나, 몸이 불편한 나는 짐스러운 존재로 버려질 수도 있겠구나, 받았던 상처가 
이제는 이기적으로 살아야겠구나, 큰 깨달음이 되기도 했지만 발전된 행동은 없다.
이 나이에 삶의 변환기 앞에서 선 나는 찾을 수 있다는 확신 없이 살아내야 할 동기를 
찾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