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이었나? 할머니가 아들이 내일 온다며 환한 얼굴을 하셨다. 어제 화초에 물을 주다 밖으로 나오신 할머니와 마주쳤다.
“뭐 하셔?”
“고구마 줄기 따서 껍질 벗겼어. 내일 아들이 온댜? 벌초하러. 일 년에 두 번은 꼬박꼬박 하네.”
벌초하러 온다는 아들을 기특해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내일이 주말이니까.”
“온다니까 반찬 좀 만들어 둬야지.”
두어 시간 지나서 할머니가 버스에서 내리신다. 손에는 자그마한 천가방이 들려있다.
아들 온다고 어느 결에 장에 나가 먹을거리를 사오시는 모양이었다. 난 집밖으로 나가 아는 체를 하려다 말았다.
아들이 온다는 전화를 받고 그때부터 할머니의 기다림과 맞음 준비가 시작된 셈이다. 설레는 마음이 그 안에서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저녁에 오려나? 늦은 밤까지 기다리다 할머닌 생각하셨을 지도 모르겠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오려나 보다.
지금은 토요일 11시. 할머니의 집 대문은 잠금장치만 풀려 있을 뿐이다. 아들이 왔다면 대문을 활짝 열어두셨을 텐데 지그려 놓은 것을 보면 아들은 아직이다. 자동차도 보이지 않는다.
기다림에 지치셨는지 고구마를 캐고 계신다. 아들들이 오면 시켜도 될 일을.. 며칠 전에는 세 그루의 향나무 전지를 손수 하셨다. 위험하니 아들들 오면 시키라 해도 기어코 이틀에 걸쳐 그걸 다 마치셨다. 아들들이 시간이 없다는 말로 얼버무리셨지만 내 눈에는 아들들한테 힘든 걸 시키기가 아까운 마음으로 비친다. 아들이 힘든 것보다 당신 스스로가 힘들고 말겠다는 마음이 그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
하지만 아들들은 늘 할머니의 기다림이 지쳐갈 때쯤에야 집으로 들어선다. 그것도 해치울 일거리가 있을 때만 일 년에 많아야 서너 번. 바로 지척에 사는 셋째 아들은 할머니가 집에 안 계실 때만 골라 가꿔놓은 먹거리를 요것저것 챙겨간다. 할머니 있으실 때 오지 그러냐는 내 말에 할머니가 공사가 다망하다나?
나는 속으로 할머니가 공사가 다망하긴? 평상시에 육묘장에 다니시고 한 달에 한 번 절에 다녀오시는 게 전부인 걸. 그러더니 할머니가 육묘장에서 오시기 30분 전에 챙겨서 훌쩍 떠나버렸다. 저녁 무렵이었으니 바쁠 것도 없을 시간이었는데.
이것저것 가려먹는 것이 많으신 탓에 아들 집에 한 번 가는 적이 없으시다. 아들들과 함께 밖에 나가 사 먹고 들어오는 법도 없으시다. 며느리들에게 와라 마라 하는 요구도 없으시다. 1년에 두세 번 얼굴을 디밀고 말아도 말이 없으시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그만한 시어머니도 없다.
세태가 그러니 어쩌겠어요? 며느리는 남예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 남의 집에 와서 일가를 이뤄주는 것만도 어디예요. 두어 번 할머니에게 그렇게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속에 일렁이는 씁쓸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할머니도 두어 번 그 마음을 내비추신 적이 있다.
할머니의 아들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왔다가 내일 벌초를 하고 서둘러 올라가겠지. 그 짧은 만남을 설레며 기다리신 할머닌 잠깐의 기쁨으로 설렘을 접으시겠지.
그게 세태니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