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무더위가 처음 시작된 6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언제나처럼 새벽 4시 30분에 남편은 출근하고 초등학교 2학년인 큰애도 아침 7시 50분에 학교에 가고 나니 집에는 일곱 살 작은애와 나만 남았다. 작은애는 지난밤부터 몸 상태가 안 좋았다. 열이 있었고 물 마실 때마다 목이 아프다고 징징거렸다. 토요일이니까 병원에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아이는 계속 자고 싶다고 했다. 아이를 깨우던 나도 눈이 반쯤은 감겨 있던 터라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아이 옆에 철퍼덕 누워버렸다. 아침 햇살이 사방에 퍼지고 있었다. 한데 그 빛이 어찌나 밝고 강한지 아침인데도 벌써 오후 2시쯤 된 것 같은 나른한 기운을 자아냈다.
달콤한 오전 잠에서 깼을 때는 정오가 조금 지나 있었다. 어느새 큰애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된 것이었다. 매일 아이 마중을 가는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작은애는 그때까지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흔들어 깨웠다. 형 마중도 가고 병원에도 가자고 했지만 작은애는 싫다고 했다. 큰애는 아파도 병원에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몸이 약한 작은애는 콧물만 흘려도 후다닥 병원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런 차이를 얼마 전부터 눈치 챈 작은애는 자기도 형처럼 병원에 안 가고 스스로 왕 바이러스를 물리치겠다고 했다. 사실 감기는 약을 먹든 안 먹든 하루 이틀 꼬박 앓아주는 과정을 피할 수는 없다. 집에 해열제는 있으니까 어찌어찌 견뎌보면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작은애한테 텔레비전 보고 있으라 하고 나만 학교로 향했다.
학교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차들이 씽씽 달리는 대로이고 또 하나는 좀 돌아서 가긴 하지만 한적한 길이다. 한낮의 동네는 강아지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고 고요했다. 텃밭에 옥수수는 축 늘어졌고 갖가지 채소들도 파란 잎을 늘어뜨린 채 침묵하고 있었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개망초 꽃들만 햇볕에 당당히 맞서 눈부신 하얀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들을 보면서 길을 걷는 게 좋아 즐겁게 큰애 마중을 다녔다. 하지만 그날은 그 어떤 것도 반갑지 않았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훅 끼치는 열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글이글 내리쬐는 태양 아래 모든 사물은 정지된 것 같았다. 저 멀리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는 큰애와 이쪽에서 손 흔들며 가고 있는 나만 겨우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큰애의 얼굴은 벌겋게 익어 있었고 연신 숨을 할딱였다. 나는 얼른 가방을 받아들고 큰애의 손을 잡았다. 큰애는 그늘이 나타날 때마다 쉬어가자고 졸랐다. 아이 걸음이라도 20분이면 충분한 거리인데 그날은 마치 사막이라도 건너는 것처럼 아득한 길이었다. 겨우 집에 도착했을 때는 큰애도 나도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1시 30분이었다.
아침에 끓여준 죽도 목이 아프다고 마다했던 작은애는 라면이라면 먹을 수 있겠다고 했다. 가스 위에 물을 올려놓고 나는 창이란 창은 몽땅 열어젖혔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으나 그렇게라도 해야 살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나는 곧장 세탁기를 돌렸다. 베란다 창으로 황금빛 햇살이 사정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오전에 게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놓쳐버린 햇살을 아쉬워하며 나는 서둘러 빨래를 한 줄 가득 널었다. 그러고도 그 빛이 아까워 좁은 베란다 바닥에 한가득 빈 김치 통이며 베개 신발 등 살균이 될 만한 것들을 늘어놓았다.
제 형이랑 놀면서 좀 살아나는가 싶던 작은애가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안이하게 대처했던 나를 꾸짖으며 시계를 봤을 때는 이미 3시가 넘어 있었다. 병원은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다. 할 수 없이 해열제를 한 술 더 먹인 다음 잠을 재웠다. 자고 나면 다 나아 있을 거라고 희망을 줬다. 아이는 혼자 자기 싫으니 같이 자자고 했다. 아이의 청이 아니었어도 나는 다시 누울 생각이었다. 큰애 데리러 잠깐 나갔다 온 게 생각보다 많이 피곤했던 것이다.
햇볕 쨍쨍한 오후에 아이와 나란히 낮잠을 잘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한여름에 그보다 더한 호사가 또 있을까. 나는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빨려들어 가듯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실컷 자고 일어났는데도 밖은 여전히 한낮이었다. 더구나 서향인 우리 집은 오후 4시부터 6시 사이가 가장 절정이라 해가 완전히 지려면 아직도 멀었다. 벽에 걸린 액자의 먼지까지 보일 정도로 밝은 햇살이 방안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그 빛에 감전된 듯 나는 기운을 내지 못한 채 아이 곁에 누워 계속 빈둥거렸다.
하루 종일 몽롱한 상태였던 내가 정신을 번쩍 차린 건 저녁 7시가 지나서였다. 영영 지지 않을 것 같던 태양은 어느 새 서산을 꼴딱 넘어갔고 어둠이 살포시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허둥지둥 밥을 안치고 청소를 시작했다. 하루 종일 팽개쳐둔 집안 꼴은 엉망이었다. 나는 이 방 저 방 바쁘게 뛰어다니며 괜히 애들한테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다는 자책뿐이었다면 그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머릿속엔 그제야 낮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남편이 떠오른 것이었다. 한 번씩 잠이 깰 때마다 여전히 따가운 햇살을 보며 남편 생각을 얼핏 하기는 했지만 그건 곧장 나른한 졸음에 파묻혀버렸다. 그런데 해가 지고 나서야 모든 의식이 생생하고 분명해졌다. 내가 해삼처럼 늘어져서 지겹게 보낸 그 하루 동안 남편은 꼼짝없이 뙤약볕 아래서 벽돌을 쌓았을 터였다.
저녁 준비를 다 해놓고 나는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남편 마중은 주로 아이들 몫이었지만 그날은 나 혼자 나갔다. 남편은 예고 없이 나와 있는 나를 보곤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운 눈치였다. 무슨 일 있냐는 남편의 말에 일은 무슨 자기 보고 싶어 나왔지 하며 나는 그의 팔짱을 꼈다. 새카맣게 탄 그의 팔뚝이 그날 하루의 노고를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가방을 받아 내 어깨에 멨다. 천 소재로 된 가방은 축축했다. 가방이 젖을 정도면 그 속에 들어있는 작업복이 어떤 상태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아마 그가 마신 물보다 더 많은 양의 땀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남편의 팔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곤 속으로 말했다.
‘하루 종일 낮잠만 자서 미안해, 여보.’
그러자 멀쩡하던 내 목이 갑자기 따끔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