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아홉시에 일어나 쌀을 씻어 놓고 퀴퀴한 침대에 몸을 눕힌다. 침대보를 자주 빨아도 침대에선 오래 묶은 이불냄새가 난다. 페브리지를 뿌려도 냄새는 가시지 않는다. 아무래도 침대매트리스를 바꿔야만 이 냄새로부터 해결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버린다.
나는 아침이 없다. 혼자 살고부터 쉬는 날이면 하루를 삼등분으로 갈라놓은 아침이 없어졌다. 나를 흔들어 깨워줄 사람이 없는 아침은 할 일이 없어 한가하기도 하지만 허전하기도 해서 아침은 내쳐 잠을 자는 버릇이 생겼다.
남편은 내가 일어날 때까지 내버려 두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아침밥을 준비해서 먹거나 아침상을 차려 놓고 깨우는 사람도 아니었다. 내 스스로 늦게까지 자는 게 미안해서 열시쯤 일어나 아침을 먹곤 했었다. 그래도 그땐 늦은 아침이 있었는데, 내겐 아침이 없어진지 오래되었다.
휴가 삼일 째다. 첫날 하루 산에 갔다 오고 이틀째 집을 지키고 있다. 친구하고도 휴가가 안 맞고, 이모하고도 휴가가 안 맞아 조용히 집에만 있어야했다. 한낮에 일어나 씻어 놓은 쌀로 밥을 해서 먹고 새벽 네 시까지 보던 책을 펼쳤다.
오늘 아침에 꿈을 꾸었다. 옛남자 그는 나를 배신했다. 나는 그의 집 앞으로 가서 그년과 살고 있는 집을 확 불 싸질러 버리겠다고 했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형은 되는 일이 없었다. 알 수 없는 세상을 원망하며 자기같이 억울하고 힘든 사람 고충을 실어주지 않는 oo일보사를 꽉 불을 싸질러 버리겠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확 불 싸질러 버릴 테니까 그냥…….’그리고 형은 가출을 하게 된다.
내 꿈이 맞춘 건지, 안 맞춘 건지는 몰라도, 불을 확 싸질러 버리고 싶다는 소설속의 형을 백번 이해하면서 책을 읽었다.
가만히 앉아 책만 보고 있어도 땀은 스멸스멸 구멍을 타고 기어 나온다. 내 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선 구더기처럼 땀이 기어 나와 침대보 구멍을 뚫고, 오래 묶은 침대 매트리스 구멍으로 들어가서 집을 짓고 산다. 집을 지으면서 이것들은 더욱 퀴퀴하고 음습한 냄새를 내뿜는다.
수화기를 들어 매트리스 값을 물었다. 네? 그렇게나 비싸요? 침대를 새로 사는 게 낫겠어요,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고 주전자에 물을 담는다. 냉커피에 감자 칩을 먹기로 했다. 먼저 커피를 두 개 넣고, 프림을 또 두 개 넣고, 설탕을 세 개 넣는다. 뜨거운 물을 조금 붓고, 얼음을 컵 가득 채운다. 튀기지 않는 감자 칩이라고 해서 한 상자 샀다. 상자 속엔 은박지로 싼 감자 칩 다섯 봉지가 강낭콩처럼 나란히 누워있다. 은박지를 가로로 찢으면 빨래판 닮은 동그란 감자가 나온다. 빠작빠작 감자 칩을 하나 씹어 먹으며 커피를 마신다. 책보는 맛보다 지금은 커피와 감자 칩이 더 맛있다.
상록이는 친정엄마가 다니는 교회에서 가는 여름 수련회를 떠났다. 수영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상록인 믿음도 없으면서 수영복을 챙기고 한쪽 눈알이 자꾸 빠지는 수영안경을 닦아서 하고많은 수건 중에 산뜻한 냄새가 날 것 같은 연노란 수건은 놔 두고, 침대 매트리스처럼 퀴퀴한 냄새가 날 것 같은 누리틱틱한 수건과 함께 돌돌 말아가지고 갔다.
하필 내가 휴가를 시작할 때 개는 생리를 시작했다. 이번이 세 번째 생리인데, 생리 때만 되면 개는 웅크리고 잠을 많이 잔다. 사람처럼 개도 생리중엔 움직이기 귀찮고 배와 허리가 쌀쌀 아프고, 만사가 심드렁하고 오만가지가 다 재미없고 눕고만 싶은가보다. 자꾸 내 침대로 들어와 침대보엔 생리 혈이 장미꽃잎처럼 떨어져 나뒹굴었다.
올라오지 못하게 할 수 도 있지만 여자끼린데 하루에 한 번씩 침대보를 빨면 되지, 하고 내버려 두었다. 사람의 생리는 쿨럭쿨럭 삐져나와서 기저귀를 흠뻑 적시지만 개의 생리는 꽃잎처럼 한 장 한 장 떨어진다. 방바닥에도 빨간 꽃잎이 떨어져 있어서 걸레질을 자주 했다. 걸레질을 하고 나면 내 구멍에선 땀이 쿨럭쿨럭 삐져나와 실내복을 적신다.
내가 혼자 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 하나가 결혼에 대한 환상이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아침 상쾌한 공기와 남편이 타다 주는 커피한잔, 가지런히 다림질한 색색의 와이셔츠, 아릿한 남자향수 냄새, 두런두런 주고받는 대화, 한 달 동안 수고한 월급봉투 보답의 입맞춤, 어느 봄날의 들녘과 손잡고 걷는 가을날의 오솔길, 남편에게 둘러주는 겨울 목도리.
퇴근길의 만남, 들꽃 한 송이 꺾어주는 감성과 남편이 밀어주는 청소기, 풋고추 송송 썰어 넣은 된장찌개랑 같이 먹는 저녁 식사, 가끔 해 주는 설거지 소리, 시골 가서 사는 꿈을 꾸면서 차곡차곡 늘어나는 저축통장. 이 모든 환상을 깨끗하게 없던 걸로 만들었던 남편은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 면목 없다는 문자만 휴가 중에 드르륵 들어왔다.
혼자라는 것이 편리할 때가 많다. 자고 싶을 때 자도 되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도 된다. 편한때도 많다.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아구아구 먹어도 되고, 한 남자에게 신경 안 쓴다는 것이 제일 편리하고 편하다.
남편이 되면 남편에 딸린 여러 가지 부속품이 많은데 그 부속품을 관리 안 한다는 게 편하고 편리하다. 다만 편리함과 편함을 추구하려면 외로움과 남들의 무시와 경제적인 것을 비워야 한다. 내가 벌어서 써야하고 내게 딸린 부속품들을 기름치고 고쳐주고 뺑글뺑글 잘 돌아가지는 못하더라고 그럭저럭 돌아가게 하려면 일을 해야 한다.
남편이 벌어다 주면서 경제적으로 더 잘 돌아가게 하려고 여자가 일을 하는 것과 내가 혼자 벌어야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여자 혼자 살려면 비워야 한다. 어제 비웠으면 오늘도 비워야 하고 내일도 비워야 한다. 비움을 잘 비우지 못하면 빚더미에 앉게 되고 아이들은 불만이 쌓여 비행소년이 되어 모든 책임은 엄마에게로 비수가 되어 꽂힌다.
어제 다 비운 것 같았는데, 오늘도 비울게 많았다. 확 불 싸지르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책을 보고 아그작아그작 감자 칩 한 봉지를 비우고, 꽃잎처럼 떨어진 생리 혈을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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