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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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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에 핑계까지


BY hayoon1021 2006-05-17

 

지난 4월 8일, 올봄 들어 최악의 황사가 왔다는 그날, 우리 가족은 모처럼 외출을 했다. 물론 집을 나설 때는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시내는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지만, 우리는 지름길로 걸어서 갔다. 꼬불꼬불 산길은 아무리 다녀도 질리지가 않았다. 산마루에 올라서니 시내가 부옇게 보였고, 흙먼지가 회오리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따가운 봄 햇살과 산 여기저기 피어난 진달래에 취한 탓에, 우리는 그때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 했다.

산을 내려와 시내로 접어들자 황사바람은 본격적으로 우리를 공격했다. 마구잡이로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장날 풍경도 다른 날과 달리 을씨년스러웠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기는 아까워서, 우리는 장을 어슬렁거렸다. 바람은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무엇보다 눈이 따가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눈이 마주친 남편과 나는 동시에 집에 가자고 입을 모았다.

그때 아이들이 솜사탕을 사 달라고 했다. 한 번 안 된다고 하면 바로 수긍하던 아이들이 그날은 어쩐 일인지 끈덕지게 졸랐다. 할 수 없이 솜사탕 장수 앞으로 다가갔다. 두 놈은 벌써 달려들어 색깔을 고르고 있었다. 컵 솜사탕과 막대 솜사탕, 두 종류가 있었다. 얼마냐고 묻자, 아저씨는 천 원, 천오백 원, 하고 짧게 대답했다. 거기다 솜사탕을 가리키는 아저씨의 손놀림은 어찌나 빠른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컵 솜사탕 값, 천 원을 내밀었다. 아저씨는 오백 원을 더 달라고 했다. 분명히 그 아저씨의 손가락은 컵 솜사탕을 먼저 가리켰고, 입에서 나온 말도 천 원이 먼저였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저씨는, 컵 값이 있는데 막대보다  쌀 리가 있느냐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했다. 상식이라는 말에 나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러잖아도 컵 솜사탕 먹는 방법을 묻는 내게, 아저씨가 돈이나 빨리 내라고 해서 기분이 나쁘던 참이었다. 나는 아저씨가 말한 그대로 돈을 준 것뿐이라고 우겼다. 아저씨는 실실 웃기만 할 뿐 더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떨어져 있던 남편한테 달려갔다. 남편은 어서 나머지 돈을 주고 가자고만 했다. 붙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투였다. 

오백 원 동전을 찾아 가방이며 지갑을 뒤지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나는 괜히 애들한테 화를 냈다. 욕도 퍼부었다. 물론 그 욕은 아저씨 들으라고 한 거였다. 아저씨는 구경꾼처럼 실실 웃고만 있었다. 아저씨의 그런 느물느물한 태도는 나를 더 자극하는 동시에 나는 도저히 그 아저씨의 적수가 되지 못 한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오백 원 동전을 아저씨 손에 탁 쥐어주고는 얼른 돌아섰다.

너무 분해서 나는 계속 씩씩거리며 걸었다. 남편은 그냥 잊어버리라고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나를 비웃듯이 황사바람은 더욱 기세를 떨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애들이 놀이터에서 놀다 가고 싶다고 했다. 안 된다고 했더니 뒤따라오면서 계속 징징댔다. 아까 일도 이놈들 때문이었다 싶으니까 징징대는 꼴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큰놈을 붙잡고 등과 엉덩이를 마구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 인적이 드물다고는 해도 대로에서 그런 무식한 짓을 하다니, 더구나 애한테 화풀이를! 그런 내가 치사하고 한심해서 더 화가 치밀었다.

나는 애들을 팽개쳐 둔 채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다. 남편은 자전거를 끌고 산길이 시작되는 공터에 먼저 가 있었다. 나는 남편 옆에 가서 앉았다. 나무로 둘러싸인 공터의 아늑한 분위기가 조금씩 내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러자 아까 일에 대한 남편 생각이 궁금해졌다. 

“자기는 아까 그 아저씨가 내게 한 말투나 표정을 못 봐서 그러는데, 정말 기분 나빴어. 나는 절대 그 아저씨를 쉽게 보고 큰소리 친 거 아니야. 손님으로서 할 말을 했을 뿐이야. 아마 그 아저씨, 우리보다 더 잘살 걸. 우리가 무조건 봐 줘야 할 불쌍한 사람이 아니란 거지, 내 말은.”

아, 구질구질 변명이 길어지고 있었다. 남편은, 화를 낼만 해서 냈으면 그걸로 됐다, 그러니 그만 잊어버리고 다음 일에 충실하라고 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으면 그 일의 후유증을 더 크게 치르는 편이었다. 그게 더 손해고 억울한 일인 줄 왜 모르느냐고 남편은 안타까워했다. 

그날 밤 나는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다들 이리저리 흩어져서 잘도 자는데, 나만 어두운 천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남편한테 변명을 하려 들었을까? 그런 의문과 함께 문득 옛날일이 떠올랐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다. 그때는 쓰레기통을 대문 앞에 내 놓으면, 미화원아저씨가 새벽에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거두어 갔다. 종량제 봉투가 없던 때니 날것 그대로의 쓰레기를 치우기란 참 힘들었을 것이다.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미화원아저씨는 집집마다 수금을 다녔다. 그 아저씨가 우리 집에도 왔다. 엄마는 돈이 없다고 했다. 진짜 돈은 없었다. 아저씨는 조금이라도 달라고 하며 마당 한가운데 서서 꼼짝도 안 했다. 엄마와 아저씨의 실랑이가 끈질기게 이어졌다.

그때 갑자기 안방 문이 벌컥 열리며 아버지가 뛰쳐나왔다. 아버지는 다짜고짜로 아저씨한데 삿대질을 하며 당장 구청에다 전화하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는 쩔쩔매기 시작했다. 물론 그 아저씨의 수금이 합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저씨가 요구하는 떡값은, 잘난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떡값과는 거리가 있었다. 동네사람 모두 선선히 수고비를 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저씨를 부패한 공무원쯤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내다보자, 아버지는 더욱 핏대를 세웠다. 결국 아저씨는 풀이 죽어 대문을 빠져 나갔다. 의기양양해하는 아버지가 나는 부끄러웠다. 그건 마치 다 죽어가는 사람을 상대해서는 이겼다고 좋아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가장으로서의 무능력, 무책임, 폭력, 술주정 등 아버지의 결함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날의 아버지는 또 다른 실망을 내게 안겨 주었다.

나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앉았다. 왜 하필 그날 그 일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도 아버지랑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했다는 말인가?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내 경우는 아버지와 다르다는 걸 조목조목 따져나갔다. 그런데도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나중에는 엉덩이까지 저려 왔다. 잠 안 자고 이 무슨 짓인가, 내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짜증이 밀려 왔다.

그러다가 불현듯, 애초에 문제의 초점을 잘못 짚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아버지처럼 비겁하지 않다는 데만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사실 그건 문제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건 그저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끌어온 핑계일 뿐이었다.

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뜻밖에도 간단했다. 화를 안 냈으면 좋았을 텐데 화를 내고 말았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 아저씨가 약간의 원인제공을 했다고는 해도, 황사 때문에 나는 이미 극도로 날카로워진 상태인데다 손님으로서의 우월감이나 남한테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필요 이상의 오기가 더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화는 안 내는 게 제일 낫다. 화를 낼 때 발산되는 모든 불쾌한 에너지는 결국 본인 몫으로 고스란히 돌아오니까 말이다. 그런 걸 갖고 하루 종일 변명에 핑계까지 대 가며 나는 혼자서 쇼를 한 셈이다. 내 잘못이라고 깨끗하게 인정하고 나니 비로소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