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르릉....
아이들을 학교 보낸 후, 9시도 안돼서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응~ 선자? (친정식구들은 모두 호적에 올려 기지 며칠 전까지 불렀던 이름으로 지금껏 날 부른다.)”
내게는 걸려오는 전화가 많다. 때문에 전화통에 불난다고 궁시렁 되는 남편의 잔소리를 듣곤 한다. 하지만 9시도 안된 이른 시간에 전화 하는 녀석은 달랑 이 녀석 하나뿐. 3째 이모의 아들, 바로 이종사촌 동생이다.
“뭐? 선~자~? 이제 낮술...아니지, 아침 술 먹었나? 엇따대고 누나보고 선자야. 너 죽고 잡냐?”
“어휴... 또 오버한다. 장난인데.”
“장난이라니 이 자식이 점점 싸가지로 밥 말아 먹는 소리하고 있어. 다시 말해봐!!!”
“누님, 식사 하셨습니까?”
“오~냐.”
나와 녀석의 전화는 내용의 반 이상이 나의 욕이다. 그 엄마의 그 딸이라더니, 외할머니께서 한 욕 하셨고, 우리 엄마가 욕 좀 하시고, 나 또한 꿀리지 않을 만큼 욕 대따 잘 한다.
녀석, 녀석 하니까 학생쯤으로 생각할까 걱정 되서 밝히는데 녀석의 나이는 31살. 벌써 아이가 둘에 곧 태어날 뱃속에 아기까지 포함해서 아이 셋의 아버지로 한 가정의 가장이다.
우리의 인연은 참으로 특별하다. 외할머니 손에서 함께 10년 가까이를 살았으니 사촌이긴 하지만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우리 부모님은 어부로 일 년에 한번씩, 봄이면 고기잡이를 위해서 만호리란(평택 항이 있는 곳) 작은 어촌에서 멀리 전라도까지 내려가서 몇 달씩 계셨다. 어린 우리 3남매, 나와 동생들은 그래서 외할머니가 돌봐 주셨다.
중간에 할머니와 함께 산 우리와 달리 필성(가명...반드시 성공을 이루길 바라는 마음으로)이는 갓난아기 때부터 할머니가 키우셨다. 이모가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는 바람에...
나와 5살 터울 지는 녀석은 막말로 꼴통이었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고 하지 말라는 일은 꼭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의 행동거지. 해서, 한 성질 하는 나에게 머리 무지하게 맞았다. 맞는 녀석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때리는 내가 눈물이 찔금... 뼛속으로 서서히 스며드는 그 아픔을 지금도 난 잊을 수가 없다.
밥상에 괜찮은 반찬 올라오는 날이면 해외토픽 여러 번 터질 뻔했다.
[여러분, 혈압 4~50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이 혈압으로 쓰러졌다는 놀라운 사실이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 벌어 졌다나 어쨌다나...] 하고 말이다.
별미반찬의 반 이상이 한꺼번에 녀석의 밥그릇 속에 담겨지는 꼴을 보고 있으면 울화가 치민다. 내 바로 아래동생은 나와 2살 터울이다. 그것은 속이 깊은 건지 마음을 비웠는지 화를 곧잘 꾹꾹 눌러 참았다.
7살 터울 지는 막내 녀석은 눈물만 글썽 일뿐 아무 말도 못했다. 그 꼴을 보고 있으려니 화가 치밀 수밖에. 생각과 동시에 행동으로 옮기고야 마는 단점 아닌 단점을 갖고 있는 나는 녀석의 밥그릇을 뺏어서 다시 반찬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골고루 동생들의 밥그릇 위에 올려 놔 주었다. 그러면 놈은 울고불고 난리다. 그러면 할머니는 날 눈흘겨보셨다. 우리보다 녀석에게 매를 제일 많이 드는 할머니였지만 그만큼 필성이에게 쏟는 사랑 또한 남달랐다.
“이년아! 니네 엄마가 돈 좀 댄다고 유세냐? 놈이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밥상만 차려 놓으면 지랄이야 지랄이!!!”
“할머니가 자꾸 그러니까 저 새끼가 저 모양이지!!!”
할머니의 목청 높은 목소리에 지지 않고 나또한 바락바락 대들었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음식과의 싸움(80~9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니 분명 보릿고개는 아니었건만). 밥상 앞에서, 주전부리 앞에서 난 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했다. 착해 빠진 동생들을 어떻게든 정당하게 먹여야 한다는 의무감까지 있었다.
필성이 역시 만만한 놈은 절대 아니었다. 음식을 뺏길까봐 지 손안에 들어가는 순간 침까지 뱉어 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혈압이 오를 정도니 그때는 오죽했을까?
필성의 엄마, 그러니까 이모는 제과점을 하셨다. 수원에 있는 북문에서 제법 큰 빵집이었다. 함께 사는 두 번째 이모부의 성질이 유별나서 이모는 아들을 잘 찾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틈틈이 용돈과 빵과 우리들의 옷가지들 까지도 사서 보내시곤 했다.
이모는 그런 일이 있은 후면 머지않아 얼굴에 멍까지 들어서 할머니를 찾아오시곤 했다. 돈 빼돌리는 못된 마누라가 돼서... 재혼한 것이 한 없이 후회된다고 그냥 필성이랑 마음 편하게 살 걸 그랬다고 울부짖으며 풀어내는 이모의 한에 어린 나는 가슴 아픈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이모는 끝내 이모부의 방문과 그곳에서 낳은 아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 약해져서 돌아가곤 하셨다. 또 다른 아들까지 필성이처럼 만들 수가 없다는 이유로.
필성이는 우리처럼 찾아갈 부모님이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찾아 갈수 없는 부모님만 계셨다. 우리가 부모님의 품에서 살고 있을 때도 녀석은 성년이 넘도록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사춘기를 잘못 겪어서 학교도 퇴학당하기 전까지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할머니와 이모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용서를 구한 것으로 안다.
여러 번의 오토바이 사고...지금껏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녀석의 명은 분명 길 것이다. 사업을 한답시고 벌이는 일이라고는 다방처럼 여자와 관련된 일이나 술장사 같은 것이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벌이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패는 일로 경찰서도 여럿 들락거리며 물어 준 보상금도 만만치 않았다.
필성이가 세상을 보는 것은 온통 삐딱하다. 이모와는 어쩌다가 앙숙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껏 왕래를 하지 않는다. 첫 번째 이모부, 그러니까 필성이는 아빠와도 신통한 관계가 아니다.
녀석의 외모는 요즘 말로 깍두기스타일. 짧은 머리에 검정 양복, 검정 구두. 누구에게도 뒤질 것 같지 않은 덩치. 밑에 아이들 여러 명 거느리고 다니는 깡패... 분명 평범한 외모는 아니다. 지 편한 대로 슬리퍼짝 찍찍 끌고 동네 마실 나온 차림으로 서울에 살고 있는 내게 찾아 올 때도 있다.
말로 이루 못할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필성이는 애지중지 키워주신 외할머니와도 중간에 분가에서 살았다.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는다. 토닥거리면서도 녀석이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다. 할머니께서 필성이에게 쏟은 사랑 또한 그 어떤 부모 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모자람이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녀석은 분노와 원한에 휩싸여 있었다. 모두가 녀석을 경계하고 있었다. 싸움닭처럼 누구의 말에도 시비 붙고 걸고 넘어갔다. 감히 말 섞으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필성이에게 큰소리치는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바로 아래동생이었다. 한에 사무친 녀석... 제 처자식 외에 저를 알아주는 사람은 딱 한사람 할머니 뿐이라고 생각했을 텐데...그런 할머니마저 돌아 가셨다.
남몰래 혼자서 눈물 짖는지 녀석이 없어졌다 나타나면 담배 냄새와 함께 눈시울이 벌건 모습이 되어있었다.
녀석은 외로움이 남달리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억지소리까지 해가며 욕을 구하려는 것 같다. 모두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내 뱉는 말 때문에 남들에게까지 오해를 사고 외면당하는 것이 속상하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전화 통화 할 때마다 욕사이사이 훈계 아닌 잔소리를 해대곤 한다.
“내가 조금만 널 더 팼더라면 니 놈이 지금처럼 정신 못 차리지는 않을 텐데...”
“누나가 나 때렸다고 내가 누나 말 들었어? ”
나의 잔소리에 녀석은 아직도 잘났다고 되받아친다. 그래서 내게 또 한소리 들었다.
하지만 요즘 난 한시름 놓는다. 일해서 땀 흘리며 돈 버는 것을 알았고 뿌듯함을 알았고 처자식의 중요함도 안듯 하여... 제 말로는 돈 무지하게 잘 번단다. 하긴 얼마 전에 보니, 요즘 그 비싸다는 금을 60돈이나 해서 목걸이로 하고 나타났다. 올케도 해줬단다.
그 모습에 나는 또 한마디 했다. 내 돈으로 한 것도 아니구먼... 에휴, 이놈의 오지랖 넓은 천성을 어찌해야 하오리까.
“임마, 목 디스크 걸리겠다. 그게 목걸이냐? 개 사슬이지... 사람은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냐. 아이들 크기 전에 얼른 집부터 장만하고 살어.”
이렇듯 잔소리만 해대는 내게 필성이는 간간히 전화해서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변함없이 욕먹을 소리만 해 댄다. 내가 엄마에게 욕을 벌듯이...
할머니 다음으로 이 세상에 만만한 사람이 나인가 보다.
녀석이 곧잘 묻는 말이 있다.
“누나, 먹고 싶은게 뭐야?...”
“먹고 싶긴, 내가 애냐? 밥만 먹으면 되지. 갖고 싶은 건 있다.”
“뭔데?”
“네 목걸이가 아주 탐나더라.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것 없다던데 그것 누나한테 주면 안 되겠니?”
“누나, 심하지 않다고 생각해?”
“뭐가 심해, 네가 다음에 뭐 먹고 싶은 것 있냐고 물어 보면 금송아지 먹고 싶다고 할 거야. 알았어?!!!”
“헉... 다신 물어 보지 말아야 겠군.”
“사태파악 제대로 빨랐다.”
먹고 싶은 것 없냐는 등의 말은 헛말이 아니다. 녀석은... 멀리 시골까지 내려가서 일하기도 하는데, 작년 겨울에는 전라도에서 비싼 대봉(뾰족 감) 한 박스와 호박 고구마 한 박스를 사서 보내기도 하고 홍삼 꿀까지 사서 보내기도 했다. 굶어 죽으란 법은 없다더니... 주변에서 이렇듯 날 챙긴다.(결코 하늘은 무심하지 않다는 증거다. ^^)
노가다 판에서 인부들 관리하는 일을 하는 녀석이 스트레스성 탈모를 겪는다고 했는데 만났을 때보니까 정도가 심했다. 그렇게 애써서 일하는 것이 아직 돈 관리에 있어서는 미흡한 것 같다. 그나마 올케가 야무져서 다행이다.
녀석이 올케 몰래 내게 준 돈이 아마 100만원이 넘을 것이다. 어느 누가 요즘 같이 먹고 살기 힘든 판에 남을 배려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사촌 누나를. 누나 자존심 생각해서 줄때조차 고맙다는 말보다 욕이 나오게 했던 속정 깊고 사려 또한 있는 녀석이다.
사람의 관계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지금껏 살아보니 죽고 못 살 것 같던 사람이 어느 순간 원수가 되는 것을 여러 번 본 터라, 훗날까지 기약할 순 없다. 하지만 지금 내게 녀석은 소중한 나의 동생이다.
녀석이 잘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