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위에 걸려 있던 2004년 달렸을 내렸다. 이 달력은 친정엄마가 준 것이다.
“방에 걸어라. 네가 좋아하는 들꽃이더라.”
스케치북 크기와 모양인 달력을 넘기니 배경은 흐릿하게 처리하고 꽃을 선명하게
둔 그림 같은 야생화사진이었다. 내 방으로 가지고 와서 책상다리를 하고 그 위에
달력을 올려놓고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야생화이름과 설명을 읽어 보았다. 마침
침대위에 못이 하나 자라나 있었는데 이제는 고사목이 되어 못 머리는 매끄러웠던
은색 빛을 잃은 회색이 되어 있었다. 무엇이 제일 오랫동안 못의 신세를 지고 있었
는지 모르지만 비어 있는 못 위에 야생화달력을 걸어두었었다.
난 일 년 만에 침대 위에 서서 맨 처음 달력을 걸듯이 달력을 못에서 빼고서는
침대에서 내려 다리위에 얹어 놓고 야생화사진을 한 장 한 장 보면서 지난날을
기억해 내려한다.
그래 1월 달은 얼음장 밑을 뚫고 핀 지독한 보라색 노루귀였다.
장사를 시작한지 일년을 넘기던 달이어서 난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있었다.
돈만 벌었지 쓰지를 않았다. 밖의 온도와 별다를 게 없는 매장 추위를
이기기 위해 내복을 입고 목도리를 밖에서 장사하는 사람처럼 둘둘 감고
장사를 했다. 계산대 밑에 작은 난로 하나로 몸을 녹이며 보라색
으로 변한 곱아진 손으로 돈을 받고 만원짜리 지폐를 침대 밑에 모았다가
일주일에 한번씩 은행으로 가서 저축을 하면서 집을 살 때까지 더
지독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음장 밑을 뚫고 올라오는 노루귀도 견딜
수 없이 힘들고 온 몸이 오그라들 정도로 시렸겠지만 힘들다는 말한마디
없이 이겨 내고서 저리 고운 꽃을 피웠을 것이다. 식물이 말을 못하게 만든
자연의 이치가 옳다. 그렇지 않았다면 숲으로 가면 불만이 많아 시끄러워서
사람들이 복잡한 현실에서 머리를 식히러 숲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모래만 있는 무인도로 스트레스를 버리러 갔을 것이다.
할미꽃은 2월달 달력에 있었다. 엄마는 내 방에 오셔서 달력을 올려다보시며
노란 꽃가루를 묻힌 할미꽃이 제일 예쁘다고 하셨다. 엄마의 고향이 내
고향이고 내 고향이 엄마의 친정이었다. 고향 뚝방길에 겨울이 다 가지도
않았는데 할미꽃은 언제나 먼저 일어나 뒤통수를 숙이고 낮게 서 있었다.
엄마도 그걸 추억하시면서
“할미꽃이 피면 봄이 오고 있구나 그랬지...”
“냇물을 막아 논 뚝 길에 많았지? 엄마?”
“너 외할머니 같다. 머리가 하얀게...허리가 꾸부러져서는...”
“털모자 털장갑을 끼고 있는 것 같기도 해.”
엄마는 달력을 한참 보시며 엄마의 엄마를 생각하고 계셨다.
내가 엄마 나이가 되면 엄마도 할미꽃을 닮아 있을텐데, 아직은 실감하지 못했다.
엄마도 내가 중년이 된 걸 실제로 느끼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야생화 달력을
주시면서 네가 벌써 마흔 네살이 되니? 내가 나이 먹는 건 속상하지 않는데
네가 나이 먹는 것이 속상하다는 말도 안되는 소릴 하셨다.
할미꽃을 보면서 예쁘다 하면서도 한발한발 무덤으로 가고 계시는
아흔이 넘으신 친정엄마가 안타까우신가보다.
매화꽃은 남쪽에서부터 올라온다. 봄이라는 계절은 기운이 나서는 흙이 있는
뜰마다 걸어 다니고 있다. 3월 달력엔 매화꽃이 화려했다.
그러나 난 화려한 봄만으로 머물지 못했다.
큰 딸아이가 고3이기 때문이었다. 고등학생이 될 시기에 가정을 잃고 딸아이의
소원이었던 파란색 자기 방이 없어졌다. 할머니네로 책상을 옮기면서부터
딸아이는 사춘기를 앓기 시작했다. 공부는 안하고 컴 진드기가 되어 새벽까지
붙어 있었고, 항상 부어터진 얼굴로 될 수 있는 대로 늦게 집에 들어오고,
할 수 있는대로 할머니와 나에게 반항을 했다.
“공부해야지. 고3이잖아.”
“공부는 왜 해야 하는데?”
“학생이니까 네가 원하는 대학가야지?”
“공부를 해야만 대학가나...”
“그럼 대학가지 말아라.”
“대학은 갈 거야. 왜 못 가게 해?”
딸아인 또래친구들과 똑같이 시간이 흘러 고3이 되었고, 새 학기가 되어 친구를
이겨야 대학을 가는 처절한 입시경쟁 대열에 끼어 있어야만 했다.
3월달 달력엔 화사한 분홍색 매화꽃이 덕지덕지 피어 있었지만,
나와 딸아이는 화사함하고는 거리가 멀어져 고민과 대립만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양지 바른 곳엔 양지꽃이 동그랗게 원을 그려가며 피어 있었다.
매장안도 봄의 기온이 들어와따스하다. 차 한 잔을 타 가지고 양지쪽에 앉아
봄을 즐겼다. 제법 흙 위엔 알 수 없는 초록 싹이 올라오고 양지쪽은 그늘보다
키가 훨씬 큰 새싹이 올라와 있다. 봄은 양지쪽부터 먼저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4월달 달력엔 진 노란색 양지꽃이 일곱 송이 피어 있었다.
이전에 네 식구가 살던 아파트엔 봄이면 살구꽃이 제일 많이 피었었다.
바람이 나부끼는 살구꽃잎 아래로 얘들 아빠가 출근을 하면 양복위로
꽃잎이 살짝 앉았고, 11층에서 내려다보면 신발주머니를 흔들면서 인사를 하는
딸아이 얼굴위로 살구꽃잎이 나비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살구꽃이 지고 5월이 오면 딸아이 오는 시간에 맞춰 아파트 입구 의자에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제일 꽃이 많이 피고 바깥바람을 쐬고 싶은 계절이 이때일 것이다.
조팝나무 꽃이 하얗게 흔들리는 때, 어디선가 많이 본 꽃이 피어있었다.
하얀색 조팝나무 꽃이 아니고 짙은 분홍색 조팝나무 꽃이었다.
아파트 뜨락엔 전혀 볼 수 없는 꽃, 봄부터 여름까지 꽃을 핑계로 딸아이를 기다렸다.
우리는 꼬리 조팝나무 꽃을 여름방학이 될 때까지 실컷 보았었다.
이 추억을 딸아이는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딸아이는 고3이 되고 한달이 지나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컴을 하기 위해 책상에 앉더니만 공부를 하기 위해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쉬는날이면 도서관에 드나들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찾아내서 평일날은 애견미용을 배우러 충무로까지 갔다.
공부와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 하루가 짧다고 했다.
진작 공부를 할 걸 후회한다고 했다. 불안전한 봄의 날을 지나 완전한 날이
오던 시기에, 꼬리조팝나무 꽃이 피는 5월에, 딸아이는 인생의 목표를 잡아
성실한 학생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6월이 오면 한 해가 반이 넘어간다. 6월달 달력을 보니 벌깨덩굴 꽃 넷이서
수다가 한창이었다. 난 새벽 두시까지 컴에 들어와 친구와 수다를 떨었다.
뭔 재미로 사냐고 물으면 컴에서 글을 쓰면서 또는 글을 보면서 친구와 쪽지로
수다를 떠는 재미로 산다고 말했다. 웃을 일이 별로 없는 내게 있어서 친구와의
수다는 흘러가는 냇물이었다. 여름날 들에 핀 깨꽃처럼 아기자기한 감정이었다.
벌깨덩굴은 잎도 꽃도 들깨 꽃을 닮았다. 벌깨덩굴이 닮은 게 아니고 들깨가 닮았는지
어쩐지는 나는 모른다. 입을 벌리고 신나게 떠들고 있는 벌깨덩굴 꽃을 보니
여자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친구랑 새벽 두시가 넘도록
케케묵은 과거부터 쓸데없는 사람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크게 어려운 일도
크게 웃을 일도 없이 반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난 여전히 장사를 하고 있었고, 친정엄마는 여전히 안달을 하시면서 살림을 하고 계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