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한다고, \'영화보기\'가 취미라고 말을 하면서도
\'도대체 얼마만큼의 영화를 보아야 영화가 취미라고 당당하게 얘기할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생각해 보면 영화를 \'얼마나 많이\'보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영화를 \'얼만큼 좋아하느냐\'가 더 중요한 영화보기의 잣대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어떤 영화배우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무려 스무번 넘게 보았다고 했다.
좋아하는 영화를 스무번이나??? 참 대단한 영화사랑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서너번 본것으로도 그 영화를 내가
어느정도 안다고 했는데 같은 영화를
스무번 넘게 볼수 있게 하는 영화의 힘 혹은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도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은 영화가 몇편 있긴 하다. 열손가락 안에 꼽을수 있을 만한
그 영화들은 다시 또 봐도 내 감동의 샘이 변함없이 흔들릴 것 같은 영화가 있다.
그런 영화들 중 하나인 \'그녀에게\'를 다시 보았다.
\'그녀에게\'만 벌써 세번째라니 비디오 가게 주인이 그냥 보라며 그녀...를 쥐어 주었다.
지금은 빌려다 보는 사람도 없으니 천천히 봐도 된다는 만족할만한 조건까지 붙여주면서..
수많은 문학작품 속에서 특히 영화속에서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 일것이다.
\'그녀에게\'도 사랑을 다루는 영화다. 그것도 지금은 없을 것 같은 지고 지순한 사랑을...
나도 그런 사랑 주고 싶고 그런 사랑 받고 싶다는 간절함을 일게 할만큼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에 대해 영화는 얘기한다.
사랑하는 두 커플이 있다. 베니그로와 알리샤, 그리고 마르코와 리디아다.
베니그로와 알리샤의 사랑은 순수하고 마르코와 리디아의 사랑은 쓸쓸하다.
\'순수\'와 \'쓸쓸함\'은 다르면서도 같은 사랑이다.
베니그로는 창을 통해서 반대편에 있는 무용교습소에서 발레를 연습하는
알리샤를 바라보다 사랑에 빠진다.날마다 창가에 서서 그녀의 하는 양을 바라보는 일이
그의 오롯한 삶의 의미이자 낙(樂)이다.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기회가 쉽사리 오지 않는다. 그런 어느날, 교습소를 나서다
알리샤가 지갑을 떨어뜨린다. 지갑을 주어 뒤따라 가던 베니그로는 드디어 그녀와
얘기할수 있는 기회를 얻고 그녀의 집을 알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가 정신과 의사라는
것을 또한 알게된 베니그로는 가짜환자가 되어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가고
우연히 알리샤의 벗은 몸을 보게된 베니그로...
만나지 않아도 감정이 통하지 않아도 사랑은 시작되고 사랑이 깊어갈수
있을까? 베니그로는 자신이 알리샤를 위해 이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어 버린다.
그것은 알리샤가 교통사고가 나서 식물인간이 되어서도 변함없는 가치였다.
베니그로는 간호공부를 하고 간호사가 되어 식물인간이 된 알리샤를 정성껏
보살핀다. 알리샤를 날마다 깨끗이 씻기고 날마다 깨끗한 새옷을 입히고
심지어는 화장하는 법까지 익혀 알리샤의 얼굴을 아름답게 가꿔 준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그날 있었던 일, 슬프고 행복했던 일들을 마치 살아있는
연인에게 얘기하듯이 자세하게 들려준다. 연극을 보거나 춤을 보거나
빼뜨리지 않고 알리샤에게 들려주는 베니그로의 자상함은 거의 신의 경지다.
그렇게 알리샤에게 헌신하는 베니그로의 생각은 \'언젠가 다시 살아날 알리샤\'를
위함이다. 그러니 베니그로의 사랑은 숭고하다.
그 병동에 또 한사람의 식물인간이 입원해 온다. 리디아.. 마르코의 연인이다.
리디아는 드물게 있는 여자투우사다. 최고의 투우사를 꿈꾸던 리디아는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그만 초대형 소에게 받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마르코와 리디아.. 둘은 서로 사랑하지만 또한 둘은 옛사랑에 대한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또한 같다.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는 마르코와 역시 아직
끝맺지 못한 약혼자와의 관계가 껄끄러운 리디아의 사랑은 그래서 쓸쓸하다.
마르코는 감정이 아름다운 남자다. 영화가 시작되면 피나 바우쉬의 춤이
공연되는데 그 공연을 보면서 울던 베니그로 옆에 앉았던 남자가 마르코다.
뱀을 보고 깜짝 놀라는 리디아를 보면서 옛애인을 떠올리고 눈물짓는 남자,
혼자하는 여행을 좋아하는 여행기자인 마르코의 주특기는 그렇게 \'우는일\'이다.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있는 리디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르코는
오히려 담담하다. 그런 마르코에게 조언을 건네는 베니그로는
어떻게든 리디아가 다시 살아날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려 애쓴다.
베니그로는 무성영화를 본다. 알리샤가 좋아했던 무성영화를 보고 그녀에게
얘길 해주면 분명 그녀도 기뻐할 것 이었으므로... 그런데 그것이 말썽이었다.
사랑하는 연인들에 관한 무성영화를 얘기하다가, 베니그로는 그만 알리샤를
품고 만 것이다. 한달후 알리샤의 생리가 끝어진 것을 안 병원에서 한바탕 소통이
일어나고 베니그로는 성폭행범으로 교소도에 갇히게 된 것이다.
한시라도 알리샤의 곁을 떠날수 없었던 베니그로는 이제 알리샤로 부터
완전히 차단당한다. 간간히 마르코가 면회와서 상황을 얘기해 줄 뿐이다.
그러는 사이 마르코와 베니그로의 연대는 깊어지고 베니그로는
마르코를 진실한 친구로 신뢰한다. 어느 비오던날, 베니그로는
더 이상 좋아질 수 없는 현실을 비관하여 자살을 하고 만다.
마르코에게 알리샤를 부탁하며....
마르코가 여행지로 떠나있던 얼마간의 시간동안 리디아는죽고,
알리샤는 깨어난다. 다시 돌아온 마르코는 베니그로의 유언대로
그의 집에서 머물기로 한다. 건너편 무용교습소가 바라다 보이는
베니그로의 창가에 이제 마르코가 서있다. 그의 눈에 무연한 표정으로
무용수들을 바라보는 알리샤가 보인다. 그녀가 가깝게 느껴진다.
누워있는 모습만 바라다 보았는데 그녀를 보자 마르코의 마음이 설렌다.
둘은 피나바우쉬의 공연에서 만난다. 마르코를 처음보는 알리샤 조차도
어쩐지 마르코가 낯설지 않고 마르코는 베니그로의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영화가 함축하는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
그둘의 사랑이 결코 갑작스러운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사랑은 어떤 근원에서 만나 갈라져 오다가 하나의 강물에 이르는
것이라 영화가 설명하는것 같다.
여인의 슬픔과 고통이 영화의 첫장면을 장식했다면
영화의 끝은 남자와 여자가 아름답게 어울리는 춤을 보여주며
막이 내린다.그 춤은 마치 이제막 사랑을 시작한 마르코와 알리샤를 위한
사랑의 메세지다. \' 슬픔의 미학\'이라는 다분히 관념적인 느낌을
이 영화는 아름답게 풀어 주었다.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나는 느낌,\'그녀에게\'를 본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