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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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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5년차 주부가 남편에게 보내는 긴 편지


BY 얼그레이 2004-02-20

곰돌이아저씨!

나, 곰순이...

오늘도 많이 늦네...
내 군것질거리 사온다고 이러저리 또 헤매나보지...
고놈의 내입이 방정이라서 곧장 집으로 와도 될걸..
참새방앗간을 들려야 되니 괜히 미안타...
그래도 군말하지 않고 그 투정 다 들어주는거 보면,
당신 맘이 태평양이라서 그런건지,
아니면 생과부마냥 혼자 긴밤을 늘 지내우고 있는 날 생각해서인지..

근데, 이런 혼자있는 시간을 즐기다가도 때론 너무 싫을때가 있지..
오늘처럼...
차라리 당신이 일찍 퇴근해와선 밥챙겨줘야 하는 수고로움이 싫어서
당신에게 바가지를 벅벅 걹기라도 했으면 속이라도 후련하련만...
아니면 애궃은 방바닥만 빡빡 긁으면서
'이이가 언제오나' 시계만 마냥 뚫어져라 쳐다보며 하루가 차라리 길게 느껴지든지...

이것두 저것두 아닌 막연한 이런 초연함이 가끔씩 싫을때가 있어..
차라리 내 연민에 빠져서 마구 슬퍼서 흐느껴 울든지
아님 당신이 넘 미워서 애간장을 녹이면서 복장터져하든지...
차라리 그 둘중 하나였음 좋겠는데...
그것두 맘대로 안되네...

이것두 일종의 세월의 무상함인가!
(이 나이에 세월을 운운하는것도 가짢치만서도...)
이젠 혼자서 훌쩍훌쩍거리는 일도 옛일이 되어버리고,
시댁일이며 집안일이며 모든일에
항상 태연하고 방관으로 일관하던 당신을 보면서
내가슴을 치며 답답해하는 것두 차츰 그 자취를 감추는걸보면...

내가 나를 포기한건가!
아님 내가 당신을 포기한건가!
그것두 아니면 내가 한층 더 무르익은 성숙한 존재로 되어가는건가!

어찌보면 당신의 그러한 태도가
가정내에서 내가 할일을 당신이 만들어 준 일종의 배려라고 믿고싶어..
결혼전 친정에서도 막내라 응석받이로 자라서
세상물정 전혀 모르는 내가
이만큼 내가 닳아빠지고 약아빠질수 있는것두
당신의 빈자리를 나로하여금 채우게끔 유도한거라고...

이십년넘게 한동네 살면서도 서로 모르고 지내다가
결혼할때가 되어 촌가시내와 촌머슴애가 만나서
부부의 연을 맺어,
내옆에서 코를 쌕쌕 거리며 잠들어 있는
살갗 뽀사시한 수다스런 한 놈-울 꼬마곰돌이가 어느덧 생겼더랬지...

이 한 녀석으로 인해 당신의 어깨가 한층 더 무거워졌을거야...
나 또한 부모된 책임으로 그 부담감을 영원히 떨쳐버릴수 없을것같아
지금까지 내 한몸이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걸로 착각하고 살았는데...
당신의 아내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로서 굳건히 서기위해선,
내 몸을 그전보다 더 아끼고 사랑하고 단련시켜야 할것같아...

자정을 훨씬 넘는 시각에 귀가하는
당신의 건강을 생각하면 자기전에 먹는 야식을 권하고 싶지 않지만,
아침잠 조금 더 잘려고 아침밥을 건너뛰는데,
그 야식조차 안 챙겨주면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해 줄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것 같아서
그거라도 챙겨주려고 하는데...

허겁지겁 밥을 먹곤 쉴틈도 없이 피곤에 지쳐 금새 잠들어버리는
당신의 뒷모습이
어쩐지 예전에 피곤에 쩌른 울아버지의 주무시는 뒷모습을 보는것같아서
맘이 무척 아린다...
그리고 무척 애처롭기도 하구...

무엇이 이다지도 당신이라는 남자를 가여워보이게 할까?
가장으로서의 의무...
남편의 역할...
아빠라는 위치...
한남자의 끝없는 질주..
평범한 한 사회인...

등등등...

한국사회가 남자들이 유흥을 즐기기엔
참 멋들어진 세상이라고 하지만...
당신에겐 그 세상 자체가 또 다른 업무의 연장선인걸...
권하고 싶지 않은 접대를 해야 하고...
자신의 배알을 죄다 내놓아야 하는
숨가쁜 현실과
부대껴 살아가는 당신인데...

이런 당신과는 너무도 차이가 나는
오후6시이면 땡돌이처럼 퇴근하는 남편을 둔 내 대학친구 당신 알지?
하루는 그 친구가 
자기남편이 저녁8시에 집에 들어온것가지고
나에게 푸념하더라...
난 그냥 웃으며 울남편같은 사람도 있으니
위안하며 살라고 했었지...

그리고 억울하다는 느낌도 들었는게...
그렇게 일하고도 월급이 나오는게 신기했구...
심지어 퇴직금까지도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공무원이 될려고 기를 쓰고 덤비는거겠지...
한편으론 내가 매달 내는 세금이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었어...

당신이 수고한것만큼 그 댓가를 충분히 받지못하는
괜한 피해의식때문인지...
친구에게 그런 심술궃은 생각까지 했었어..

그래두 그 누구집보다도
울부부 집마련도 참 빨리 한것 같다...그치
물론 융자도 다소 끼여있지만...
그건 무엇보다도 당신이 날 믿고 전적으로 경제권을 맡겼고
그에 뒤질세라 나 또한 당신이 피땀흘린 돈
한푼이라도 헛으로 날리지 않기위해
이 악물고 악착같이 절제하며 살아왔지...
당신또한 불평하지 않고
일조해줘서 무척 고맙구...

저번집에 살때만 해도....
종이기저귀값 아낄려고 천기저귀 삶고 말리고 개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했었지..
무슨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외식하는것도 요리조리 참 많이도 생각하구..
가족나들이 나갈때도 사먹는 돈 아끼기위해서 도시락을 꼭 싸들고 다니구..
손빨래 하다 남은 물이 설령 구정물이라도 함부로 버리는 일도 없었구...
십원이라도 더 싸게 살려고
여러군데있는 할인마트의 가격들을 알아볼려고 다리품도 엄청 팔았지...

행여나 아줌마들끼리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생산성없이 허튼데에 돈을 쓸까봐서
내게 호의를 보이던 아줌마들의 손길도 냉혹히 뿌리치구...

당신도 기름값과 주차비 아낄려고 지금껏 자동차 놔두고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한달 용돈 적다고 투덜거릴때
품위유지비조로 더 올려줘야한다는걸 알면서도 늘 모르척했지...
내가 왜 그렇게 지독하게 굴었는지
당신에게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알거야...

결혼하고 5년동안 미장원엘 한번도 안 갔다고하니
주위사람들 전부 놀래더라...
집에서 약 사다가 당신이 내 뒷머리부분 탈색이며 염색이며 파마며 다 해줬지...

당신주머니나 집구석에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백원, 오십원, 십원과 같은 짤짜리동전은
보는 즉시 죄다 책장맨밑에 있는 빨간색 돼지 저금통으로 직행하구...
그 저금통이 묵직해지면 은행에 갔다주면
시퍼런 배추잎으로 둔갑하는 흥분을 맛보기도 하구...

울아이 옷이며 장난감이며 책이며
조카들 쓰던것 죄다 물려받았고...
얼마전에 처음으로 울아이 조그마한 책한권 큰맘먹고 사줬지...
서점만 가면 녀석이 만지작거리며 눈을 뗄줄 몰라하던
장난감자동차....112경찰차
그것두 당신이 얼마전에 녀석에게 첨 사다준 장난감이지

절대로 궁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조차 즐기면서
우린 지금껏 열심히 앞만보며 살아왔지...

집장만하고 형편이 좀 나아지면서
내스스로 고삐를 좀 늦추자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몸에 베인 습관은 참 오래가나봐
함부로 못 버리는걸 보면...

그렇다고해서 남들처럼 맘껏 즐기지못한것두 아니구...
그렇게 푼푼히 아낀돈을 목돈으로 만들어
여기저기 물건너 바다건너 여행하면서 둘이 참 많이도 싸돌아 다녔지...
작년여름엔 사스덕을 톡톡히 보았지
전화위복인지 사스로 여행사가 불황을 맞아서

사스가 막 수그러지는 적기에 싼가격에 구입한 비행기티켓으로
우리 신혼때 했던 약속이 지켜졌었지...
나중에 딸자식 낳으면 꼭 다시 올거라고...
당신과 나의 신혼여행지...
두돌도 안된 녀석을 델고 다녀왔던일...
그때일을 떠올리면 007작전을 방불케할정도록 황당무개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참 웃기고 재미나네..
밸난 아들놈땜에 당신이 많이 혼쭐이 났지...

때론 넘 비현실적이고 넘 무모하기도 한...
감당하기 힘든 부족한 날 믿어줘서 고맙고...
사사건건 간섭하지 않고 나를 있는 그대로 지켜봐주는것만으로도 고맙고...
비록 늦게 집에 들어오지만
내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아컴 에세이방에 자주 들어간다고
질투 아닌 질투를 하는 당신이 귀엽구...

당신 그거 알아요?
내가 이런 사치스런 감상에 젖어 미치지 않고 이렇게 버틸수 있는건,
그리고 계절의 바뀜에 따라 늘 솟구치는 내 역마살끼를 결정적으로 잠재운건,
여기 아컴 에세이방이라는걸...

나만 인생이 고단할거라는 착각속에서
나를 헤어나오게 하는 곳이랄까...
나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고단하고, 부지런하고, 힘겹게, 또 때로는 밝게, 즐겁게, 유쾌하게
살아가는 진솔한 사람들의 삶 자체를 직접 눈으로 보는것 같아서 넘 좋아...

주변사람들과의 대화거리가 늘 육아와 가사로 한정되어있는데
내 일상자체가 육아와 가사가 전부일진데
대화거리조차 그것뿐이라면
삶이 넘 지루하고 단조롭지 않을까 싶어...
그나마 그런 단조로움생활가운데 내 꽉 막힌 숨통을 트여주는곳이 여긴데...

그러니까 여기에 빠지는거 넘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물론 당신이 걱정하는건 짧아진 내 수면시간을 염려하는것이지만...
그래도 나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역할 소홀하지 않고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잖아...

오늘낮에 치과엘 갔다오면서 근처 공원에 산책을 했었다...
햇살이 무척 따사로운게...
사람들도 그 봄햇살을 맞으러
공원의 벤치 여기저기에 아이들를 델고 나온 아줌마들과 유모차들로 붐비는게...

막연하게 드는 생각이...
이렇게 봄햇살을 맞으며 여유를 부리는게 웬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어...
내가 이렇게 한가하게 있어야 하는건지...
뭔가를 해야 하는건데....
자격지심일까...

이젠 이렇게 여유로움을 즐기는 시간조차도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잠자는 시간 못지않게...

당신도 알다시피 난 참 빈둥빈둥 게으른 여자였는데
언제 이렇게 부지런떠는 여자가 되어버렸는지...
아마도 당신에게 뒤처지않을려는 내 발악일런지도 모르지...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쪼가리며 장미꽃한송이 없어서
혹시 서운해하지 않았는지...
그걸 은근히 바라는 당신 눈치 알아차렸지만...
당신도 날 잘 알잖아....
남들 다 한다고 줏대없이 따라하는 걸 무척 싫어하는 내성격
뭐든 혼자 하는걸 좋아한다고
당신이 나더러 '독고다이' 하면서 날 놀려대지만...

태생이 그런걸 어쩌남...
그런 독고다이 마누라를 둔 당신이 델고 살아야지...
내가 곰탱이같은 남편인 당신을 델고 살아야 하듯이...

내 말이 틀렸는감...
아님 말고...

올여름엔 이놈 떼놓고 그동안 부어온 여행적금 탈탈 털어서
당신이랑 나랑 유럽배낭여행이라도 갈수 있을런지...
집사는데 다 털어버려서 가계경제가 적자라서
오리무중이네...

글고 당신뱃살빼기는 어김없이 내 새해목표이자 바람이고...
내가 미주알고주알 잔소리하지 않아도 당신건강 알아서 척척 챙기구...
혹시 그 비싼 종신보험 믿고 까불닥거리면 안되는거 알지...
보험료 몇억을 나와도 당신과는 절대 못 바꿀꺼...

당신없는 이 세상은 안꼬없는 찐빵이라는걸...
진빵에 안꼬가 없으면 뭔 맛인줄 아는교...
그건 더이상 찐빵이 아니라는 뜻 아인교...
당신 내 말 뜻 알겄죠?

끄덕끄덕 한 걸로 믿고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것같아
이만 줄일께

 

당신의 사랑스런 아내
곰순이가

 

 

p.s  제 글이 행여나 님들의 몸 어느부위에 닭살이 돛는 부작용이 있을수도 있으나,

       닭살돛게 할 의도는 추호도 없음을 거듭 말씀드리며...

       갠적으로 닭살돛을 정도의 글은 아니라고 보이는데....

       내 혼자만의 생각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