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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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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여자 이야기


BY 파랑새 2003-10-21

제가 사는 아파트는 복도식이라

바로 옆에 사는그녀와 난 서로가 옆집여자가 됩니다.

앞집여자라는 모 방송국의 드라마의 예고편이 첫선을 보인날

우리는 마주보며 하하 웃었읍니다.

우리도 이렇게 옆으로 마주보면 앞집여자가 되네...하면서.

 

나보다 한살 아래인 그녀.

우리는 서로 닮은 점이 많아 

한가족보다 더 허심탄회하게 오가며 지냈읍니다.

거의 매일 반찬 한가지라도 양을 넉넉히 만들어서 나누어 먹곤 하였으며

이른 아침 폭탄맞은 듯한 머리모양새에 김치냄새 풀풀 풍기며 만나도

오히려 그런모습에서 더욱 편안함을 느꼈지요.

 

아침시간 분주하게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각각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보내놓고 나면

그녀는 어김없이 우리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탓에

저는 아예 현관문을 열어놓고 산지 오랩니다.

그렇게 그녀가 등장하면

저는 또 당연한 일상인듯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찻물을 올려 놓습니다.

그녀는 "역시 채마담이 최고야 "하는 찬사를 잊지 않고 맛있게 커피를 마셔주었고 

비로소 우리의 하루일과는 시작되었죠.

사실 거의 매일 얘기를 나누는지라 밑천이 바닥 날 법도 한데

우리는 사춘기 소녀들 마냥 끝도 없는 수다에 시간가는줄 몰랐습니다.

얘기를 하다가도 둘중 어느누가 볼일이 있을라 치면

다른 한사람은 그냥 바늘에 실가듯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지금은 병석에 있답니다.

심각한 병은 아닌듯 하지만 쉽게 보아 넘길 병 또한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평소 조금만 힘든 일을 하여도 다음날 어김없이 파김치가 되어

누워 지내던 모습을 보아왔던터라

이번에도 별일 아니겠지 했었는데...

정확한 병명도 없고 단지 근육이 뭉쳤고 허리에 인대가 늘어났다는데...

고된일을 한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 지경이 되었는지 너무 안타깝습니다.

 

여름이 끝날무렵부터 아프다는 소릴 자주 하며 병원과 한의원을 오가더니 

급기야는 추석이 끝날 즈음 입원을 하였습니다.

그 후 퇴원은 하였어도 통원치료는 계속 되었고

병원가는 일 외엔 문밖 출입도 거의 하지 않으며

집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보낸다고 합니다.

집을 방문 하려 해도 곁엔 늘 보호자로서 누군가가 와 있어서

그 또한 쉽지 않습니다.

간간히 오가는 그녀의 아이들 입을 빌어

아주 기본적인 안부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번은 그녀가 좋아하는 밑반찬 몇가지를 접시에 담아

늘 그랬듯이 불쑥 현관문을 밀고 그녀의 큰아이 이름을 부르며 들어서는데

아이의 고모란 분이 와 계셨습니다.

일부러 그녀와 아이들만 있는 시간을 택해 온 것인데도

공교롭게 손님과 마주쳤고

손님의 뭐 이런 무례한 사람이 다 있냐는 듯한 표정에

저는 쫒기듯

쟁반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나와 버렸습니다.

얼마나 무안했던지...괜한 짓을 하였나 보다 하고 후회하였습니다.

 

몸이 아파서 만사가 귀찮은 탓인지...아니면 제게 무슨 섭섭한 일이 있었던지

그녀는 아프고 난후 내게 말 한마디 하는것 조차 아꼈습니다.

거동하기가 불편하면 전화라도 할수 있으련만

오늘까지도 그녀는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무엇이던지간에

그녀의 그런태도가 몹시 마음에 걸려

그동안 내내 우울했습니다.

 

어쩌다 운좋게도 복도에서 마주치면

정작 하고싶은 얘기는 못하고 엉뚱한 얘기들만 주저리 주저리...

그런 저를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였습니다.

 

눈부시게 푸르른 가을이 이제 절정에 달한 듯 합니다.

아아 그녀는 이 아름다운 가을을 보듬어 보지도 못하고 겨울을 맞게 될 것인가...

오랜시간을 병석에서 지내다 보면 우울증도 온다는데

정말 걱정입니다.

 

그러나 내가 할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고

설사 있다해도 그녀가 마다할게 뻔합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은

비단 연인들 사이에서만 적용 되는 것이 아닌듯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서로의 삶에서 조금씩 열외되고 있는 걸까요?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서먹서먹해 질것만 같아 두려워

무언가를 해야겠는데...어떻게 해야할지...그냥 서글퍼만 집니다.

 

이 가을이 마지막 그림자를 거두어 가기전까지

꼭 그녀가 예전의 모습으로 환하게 웃으며

우리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 서 줬으면 합니다.

채마담 여기 커피 한잔!

하고 애교섞인 목소리로 외치면서 말입니다.

 

 

그녀는 빠른 쾌유를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