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명절이 오는게 싫다.
음식을 많이 해서 몸이 고되다거나.
고향을 찾아서 시골에 내려가야한다는 그런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때보다 더 쓸쓸하고, 한가하기 때문이다.
양쪽집안에 다 어른이 없는 우리집은, 명절 연휴가 더 무료하고 시간이
많아서, 따로 여행을 계획하거나, 집에서 다큰애들과 뒹굴며 TV를
보거나, 낮잠을 자곤 한다.
태풍 소식과 함께 이번 명절은
비를 동반해 찾아왔고,
송편을 사려고 떡집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며 생각한 결론은
차츰 사람들이 떡같은건 간단하게 사다먹고 명절을 지낸다는 것이다.
딸이 둘이나 있는 나는,
가르칠겸 해서 추석땐 송편을 빚어보려고 벼르지만 올해도 또 그냥
떡집 앞에 줄을 서서 만원짜리 한장 만큼 떡을 샀다.
시어머님이 살아 계실땐 아이들이 어려서 일하는게 힘이들었지만,
색색의 물을 들여 송편을 만들어 솔잎깔고 찌어서 주위에 나누어주고
올때 싸와서 냉장고에 넣었다가 구워먹곤 했었다.
시어머님은 손이 크셔서 음식을 많이 하셨는데, 며칠씩걸려서 장을봐다
놓으면 며느리 셋이 전날 가서 빈대떡도 부치고, 설날엔 만두를 빚고
추석엔 송편을 빚곤 했다. 그땐 하하호호 동서들이 모이는게 재미있었는데....
어머님이 소천하신지도 20년이 되었다.
세동서가 만나 같이 명절 음식도 만들고 소소한 집안 얘기도 하고
남편흉도 보고 하면 좋으련만 어머님 가신후로 일을 부담스러워하시는
형님은 모든걸 분담해서,
각자 집에서 음식을 해가는걸로 바꾸어버리셨다.
막내인 나는 제수용품을 사가고-아이들이 많아 입시에 시달린다는 이유
로 간편하게 해준다는 형님의 배려였다- 둘째 동서는 붙임요리를 모두
맡아하고 나머지를 큰댁에서 준비한다.
이제 그 습관도 오래 되어서 자연스러워졌지만 처음엔 너무 형식적인것
같아 섭섭하기도 했었다.
더군다나 모두 서울에 사는 처지이고보니
사람들이 귀경전쟁이라고 할만큼 힘들게 고향으로 가는것에도 무관심
해도 되고, 음식을 장만 하지도 않으니까 명절 하루전날 오후쯤 나가서
제수용품을 죽 사들고 들어오면 된다.
물가가 오르면 오른대로 내리면 내린대로 적당한 지출을 하면 된다.
종가집 맏며느리인 친구는-물론 지방으로 내려간다- 나처럼 팔자 좋은
여자를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얼마나 편하고 좋으냐고.......
그래도 난 북적이는 고속도로에서 차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면 억지
로 라도 가족이 대화를 많이 하게 될테고, 고향의 냄새가 물씬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는 즐거움을 아이들에게 안겨주고 싶다..
기다려지고 재미도 있을것 같다.
아쉬움 없이 자라난 우리 아이들은 다른것으로는 부족한게없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계신게 제일 안타까운 일이다. 이젠 다자라서
그런말을 덜 하지만 어릴땐 언제나 우린 왜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냐고
투덜대곤 했다.
어쩌랴!
아빠 엄마가 둘다 늦동이라서 부모가 안계신걸......
딸들은 가족이 많은집으로 시집을 가면 좋겠다. 물론 화목하고....
명절이면 북적이고,- 주부들이 힘이 들어도-, 왁자지껄 하는게 명절의
냄새가 날것 같다.
우리 가족은 명절날 아침이면 각자 일어나 준비하고 준비한 제수용품을
싸들고 큰댁으로 간다.
세가족이 준비한 음식을 상에 놓고 차례를 지낸후에 아침을 먹고 치우고
헤어진다. 원래가 말이 없는 사람들이라서 별 말도 없다.
전형적인 서울사람들인 시댁식구들은, 아주 도시적이라서 서로 자기식으로들 잘 살아가고 다른집 일엔 관심이 도통 없이 무관심하다.
흠잡을데는 없지만 약간은 차갑고 정이 없는듯 보인다.
누구네 집에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지, 무슨 일들이 있는지 거의 모르고
지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이름붙은날 그저 의무적으로 만나고
헤어진다. 그렇다고 서로 언짢은일이 생기지도 않는다.
정말 서울 사람들이다. 모든게 안정적이고 조용하다.
시골에서 자란나는 처음엔 그런게 익숙치 않아서 서운할때도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내가 더욱 그렇게 되어버렸지만......
예전에 추석에 아빠랑 아이들을 두고 싸이판이랑 괌으로 여행을 한적이
있었는데, 명절날 아이들을 그냥 집에 데려다 놓고 큰엄마가 가버렸다는 얘길 듣고, 내가 울었던 기억이 있다.
아빠는 괌 공항에서 울고있는 날, 더 이상해 했다.
당연한 일에 내가 민감하다고 나무랬다.
나는 해외 여행을 갔으면서도 우리아이들을 명절이니까 먹여줄꺼라는
생각은 완전한 나의 착각 이었다.
그후론 우리 아이들은 내가 단도리를 해야한다는 상식을 갖고 있다.
이제 난 서울 토박이 사람에게 시집을 온 여자로 길들여져서,
깔끔하고, 깍듯해져있다. 충정도의 푸근하고 느리고, 의타심강한 막내
의 그림자는 서서이 지워져 갔다.
아빠는 메너맨이란 별명을 가진 사람이다. 경우에 맞지 않으면 손톱
만큼도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게 장점으로 보여질 때도 있지만 때론
냉정해 보일때도 있다. 시댁 식구가 모두 그렇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도 너무 도시적이 아닌가 걱정 될때도 있다.
만약에 다른 분위기의 집으로 결혼을 하면 적응을 못하면 안될텐데....
우리 막내가-대학2학년- 제일 어리니까 아이들도 조용하다. 자주 만나지
않으니 별로 할말도 없나보다.
이번명절은 애완견 자로를 데리고 갔더니 모두 그녀석을 바라보며 꼭
애기를 보며 놀듯이 웃다가 돌아왔다.
고모가 두분인데 똑같은 집안 분위기이다. 잠깐 들러 인사를 드렸다.
우리의 명절은 이게 끝이다.
형님이 싸주신 빈대떡과 명절음식을 집에 가져오니 식어버린 음식이 꼭
쓸쓸한 내마음 같다.
불에 덥혀서 먹어야 하는 것처럼 내마음도 추스리고 아이들과 화기애애
한 이벤트를 만들어봐야겠다.
비가 내리니 외출을 할 수도 없고,.....
우리집은 명절이오면 더 쓸쓸하다. 한참후엔,
우리집은 아이가 셋이니 결혼해서 손주도 생기고 두사위에 며느리까지
있을테니까, 지금 생각 같아서는,
신나는 명절을 보내야지. 맛있는 음식도 많이하고....
그때는 우리 며느리는 명절 스트레스로 명절이 오는게 싫을지도
모를일이다. 아니면 나도,
지금 우리 큰댁과 똑같은 분위기를 대물림 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