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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못 낳으면 사랑 받을 자격 없나요?


BY 후리랜서 2000-11-12

나는 이 가을이 지나가면 내일 모레가 오십이다.
아이가 없는 설움...
결혼 생활 아주 늦도록까지 그 설움을 모르고 살았다.

남편과 나는 아주 취미가 비슷해서 히히닥거리느라
아이의 필요성(물론 안 생긴거였지만)을 그닥 느끼지
못하기도 했고,
현실감각이 아주 제로에 가까운 우리 두 사람의 한심한(?)
성격때문이기도 했다.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남편의 성격은
좋게 말해 선비이고,나쁘게 말하면 한량이다.
딸각발이 부부라고 표현하면 상상이 쉬울까?

우리는 마냥 젊을줄 알았나 보다.
자식들과 알콩달콩 사는 남들을 질투할 줄도 모르고
우리 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자유를 만끽했다.
영화,연극,음악감상,여행...
취향이 비슷해 히히덕거리며(대체로) 사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아이>는 시비를 걸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아이>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을 했다.
나는 숫자에 무지 약해 무슨 이야기를 할때면
며칠 전, 얼마 전,아주 오래 전,아주 먼 옛날 옛적에...
시간에 대해서는 그렇게밖에 말할수 없는데,
그 얼마 전의 일이다.

마냥 붙어 지내던 우리가 서울과 지방에 떨어져 살게 되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먼다던가?
잉꼬부부로 소문난 우리에게도 장거리는 너무도 혹독했다.
둘이 떨어져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아프기에 너무나 충분했다.

그러던 어느날,
혼자 <파도>란 연속극을 봤었나?
아이가 없는 이 경진과 동네 아낙이 머리채 붙들고 싸우는데
"아이도 못 낳는 니년이 서방복이 있는게 벨이 꼴린다,이년아"
동네 아낙이 이 경진한테 그렇게 이를 갈아 붙이는 것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비어갔다.
"애도 못낳는 병신같은 년이 사랑받을 자격이 어딨어?"
병신! 아이도 못 낳는 등신!
<아이가 없는 설움>보다 <아이도 못 낳는 병신>이라는 자학은
참으로 처절했다.
마흔도 훌쩍 넘어서 <병신>이란 자학을 처음으로 해보는
그 고통이라니...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만 그 사실을 몰랐다니?

<병신>이란 단어는 그렇게 나를 무참히 짓밟아 갔다.
그렇지 않아도 배고파 죽고,배불러 죽고,좋아 죽고,싫어 죽고,
죽을것 투성이던 <병신 같은 년>은 그렇게 서서히 죽어 갔다.
끝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나를 죽이고 덩달아 남편까지
할퀴려 드는 그때의 처절한 고통이란...

"병신같은 나한테서 제발 떠나. 나만 없으면 너는 훨훨
날아갈거 잖어. 제발 나를 떠나 줘!"
바락바락 악을 써댔던건 나를 떠나지 않겠다는 남편의 대답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우린 죽을때까지 함께 사는 가족이야. 넌 정말 이제까지
그것도 모르구 살았니? 누가 뭐래도 우린 가족이라니까?
왜 이렇게 못쓰게 변하는거니?"
널부러져 누워 있는 나에게 뜨거운 미음까지 쑤어 멕이며
남편은 다시 나를 소생시켰다.
뜨거운 미음을 받아 먹으며 울컥울컥 피울음을 토해냈다.

벼랑 끝에서 바락바락 악을 쓰며 나를 해하고 남편을 해치던,
기나긴 어둠 속 터널을 남편은 다행히도 내 손을 놓지 않은채
동행해 주었다.
다시 그때의 고통을 말해 무엇하랴?

그런 시간들을 지나며 우리는 같이 늙어가고 있었다.
이제 <아이>를 탐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가 되어 버렸다.
<아이>가 없어서 주위가 마냥 허전하면서도 우리 남편은
어제도 오늘도 선비가 아니던가?
모자라도 놓여진 형편에 그저 감사하고 살면 그뿐...
산다는 건 그만큼 서럽고도 질긴 모양이었다.

아이를 못 낳으면 사랑 받을 자격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