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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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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이 삼촌(11)-달빛도 없는 밤에...


BY 솔바람소리 2008-12-03

사방이 훤하게 트여서 일까, 아니면 일렁이는 바닷물의 냉기가 그대로

올라와 작은 마을을 뒤덮고 있어서 일까, 바닷가의 바람은 강하면서도

매서웠다.

해가 일찌감치 물러가고 구름 속에 가려져 제 역할을 못하는 달빛조차 없는

칠흑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대문밖에 서있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사돈이라니...

어쨌든 그라도 와줬으니 곧 집안이 따뜻해 질 수 있겠구나, 안도하는 마음으로

대문을 활짝 열고 연장통을 들고서 바람 속에 서있는 사돈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보일러가 어디 있느냐기에 현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 철제 문 쪽으로

안내했다.

 

“불은 어디서 켭니까?”

 

굵직한 목소리의 사돈이 물었다.

 

“글쎄요... 거기 문가에 없나요?”

 

다섯 평 남짓한 보일러실에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나도 몇 번 들어가 본 적은

있었지만 모두 낮일 때였다. 내겐 그동안 불이 있고 없고 확인조차 할 필요와

일도 없었다.

천정이 낮은 보일러 실 안으로 라이터를 켜고 사돈이 꾸부정하게 들어가서

문가의 벽을 살펴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른 집안으로 들어가서 막내 동생에게 후래쉬를 달라고 해서 들고

내려왔다. 드럼 다섯 통 불량의 기름을 담을 수 있는 철제 탱크가 가득

찬 보일러실 밖으로 기름 냄새가 물씬 풍겼다. 전구가 없는 어둠 속

그곳 문 앞에서 등을 보이고 쪼그리고 앉은 사돈이 내게 후래쉬 불을 비춰

달라더니 보일러 기계와 탱크 주변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곤 연료통 청소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며 하나씩 뜯어내기

시작했다.

 

대문을 닫은 담장 안이라 맞바람은 피할 수 있었지만 찬기가 칼 날 되어

손가락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나의 온몸을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누나!!! 민욱이 형한테 전화 왔어요!!!”

 

현관문을 열고 나온 막내가 계단 밑을 보며 말했다.

그리곤,

 

“어? 삼촌이 오셨네.”

 

하며 사돈을 반기며 아는 체를 했다. 나는 동생에게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서 공부를 할 것과 민욱에게 다음에 전화하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7살 아래 막내는 내게 있어서는 동생 이상의 낳아서 키워본 적 없는

자식 같은 존재였다. 부모님과 떨어져서 지낸 적이 많은 우리였기에

늘 보살펴야 했던 소중한 동생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동생은 누나 덕에 졸지에 혼자 있을 때가 많아져서

그런지 어느 날부터 외롭기는 마찬가지였을 사돈과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입만 열었다 하면 하는 얘기라고는,

 

‘선영이 삼촌이 ~ 사줘서 먹었어요.’

‘선영이 삼촌이 ~ 얘기 해줬는데 엄청 재미있었어요.’

‘누나, 선영이 삼촌이 자는 민박에 오늘 갔었는데요....’

‘선영이 삼촌이....’ 하는 말들뿐이었다.

 

고맙다는 마음이 들긴 했다. 내 동생에게 잘 대해준다니...

하지만 나는 동생에게 그 사람과 자주 어울리지 말라고 했다.

같이 어울려서 좋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동생은

완전한 그의 편이 된 것처럼 내 눈을 속여 가며 만나곤 하는 것

같았다.

 

동생이 들어가고 다시 어둠 속엔 사돈과 나, 단 둘만 남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사돈이 불의 방향이 잘 맞지 않는다며

방향을 가리키며 한쪽을 비춰달라고 했다.

탱크와 연장들로 가득한 비좁은 보일러실로 내가 들어 갈 수도 없었다.

그의 등 쪽에서 불을 비추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잔뜩 몸을

구부려야만 그가 가리키는 곳에 불을 비출 수가 있었다.

그런데 몸을 구부리니 내 긴 머리가 미끄러져 내려가서 사돈의

얼굴 쪽까지 흘러내려가고 말았다.

 

“죄송해요... 고무줄로 쫌맸어야 했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은가요?“

 

“예... 좀 걸리겠는데요...”

 

한쪽 어깨로 몰아서 걸쳐놓은 며칠 전에 스트레이트로 핀 내 머릿결이

자꾸만 사돈의 얼굴까지 미끄러져 내려가는 통에 나는 한 손으로는

머리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후래쉬를 잡아야 하는 고난이도(?)의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시간이 지속되다보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자세를 고치다보면 연실 내 머리카락은 사돈의 얼굴 한쪽으로 흘러 내려

가고 말았다. 학교와 학원 숙제만 아니라면 동생을 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상황 속을 버티고 있었다.

 

“이모는 좋으시겠어요...”

 

힘겨운 자세에 몸이 불편하고 오랜 침묵에 마음마저 불편한 때에

사돈이 입을 열었다.

 

“제가 왜요?”

갑작스런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잖습니까.”

씁쓸한 듯 했다. 그의 말의 여운이...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거야 모두 그렇잖아요.”

 

“ㅎ ㅎ ㅎ... 모두는 아닙니다. 저는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객지로 혼자 돌면서 살았습니다.“

“......”

“제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뱀에 물려 돌아가셨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뱀이 아주 싫어요.“

 

사투리가 잔뜩 섞인 묻지 않은 말들을 꺼내는 그의 뒷모습이

처량해보였다.

 

-학창시절에 친구들이 가끔 집안에서 부모님들이 편애가

심하다는 불만 섞인 투덜거림을 늘어놓곤 했다.

오빠만, 남동생만 잘해준다는 하소연을 들을 때 딸이 귀한 집안의

나로서는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집안마다 모두 딸이 귀하고 그래서 사랑받는 줄로만 알았다.

내가 살아간 삶이 모두에게 해당 되는 줄로 알았기에... 고모가

한분뿐이고 이모가 많은 내가 정상이고 고모는 많은데

이모는 한분뿐이라는 친구들이 잘못된 거라고 믿었던,

주변마저도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살았다... 그래서 남들의

부러움의 대상이던 내가... 정작 당사자인 나만이 얼마나

호강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사돈의 말을 들으며 문득 지난 날 친구들이 했던 말과 비슷한

상황들이 열거되고 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그때보다는

안쓰러운 연민이 더 강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어둠 속에 단 둘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채취가 바로 코앞에서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에

있어서 그랬던 걸까?

묘했다... 기분이... 내가 아닌 것 같은...낯선 기분들이 어둠속에서

나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저는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웠지만

선영이 이모처럼 다 큰 딸을 업고 다니는 사돈 어머니와

무섭다고 소문난 사돈어르신께서 한번 씩 뵐 때마다 이모에게 꼼짝

못하는 것을 보고... 아!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tv에서만 나오는  얘기가 아니구나, 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모는 복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사십시오.“

 

“......”

 

그의 말에 나는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요?’ 하는 덤덤한 말로 받아 칠 수가 없었고

‘그래요...’하며 간단하게 수긍할 수도 없었다.

그의 뒤에서 바라보는 쳐진 어깨가 어찌나 불쌍해 보이던지...

이상한 일이었다.

그동안 갖고 있던 어색함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같이 다니는 남자... 애인입니까?”

“!!!... 민욱이 형이요?... 아닌데요...”

 

손가락이 분해한 보일러부품들 위에서 바삐 움직이면서도 사돈은

계속해서 내게 말을 시켰다. 그의 갑작스런 질문에 대답하는

내 말투엔 평소의 까칠함이 그 순간만은 없었다.

 

“호진(막내 동생)이가 그러던데요... 이모 만나는 남자들 많다고...

편지를 주고받는 남자들까지요...“

 

“그놈이 별말을 다 했네요. 그런 건 왜 물어보세요?”

 

변덕스럽게 다시 까칠해진 내 말에 사돈은 뭐라고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펜팔을 주고받던 친구들의 연락이 부쩍 뜸해졌던 차였다.

집에 있는 동안 가요 책 뒷면 펜팔 페이지에 내 이름을 올리고 나서

날아왔던 많은 편지들 중에 동갑 친구 2명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만나기도

했었다. 자주 오던 편지가 어느 때부터 뜸했다. 그러고 언젠가는

편지 속 내용 중에 요즘은 보낸 편지에 왜 답장을 안 하냐는 섭섭함이

담겨있던 적도 있었다. 이상한...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다.

나는 편지가 오면 며칠 안에 답장을 보내곤 했다. 상대방이 답장을

안한다고만 생각하고 지냈었는데...

사돈이 막내에게 나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정보를 캐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