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499

그리움의 청정지대


BY 今風泉(隱秘) 2003-07-02

1.

장미가 담장을 감고 올라 곱게도 피었다.

유라는 아침부터 어제 저녁 새로 들어온 화초에 물을 줄 모양이다.
수도꼭지를 물고 길게 늘어선 호스 끝에서 뿜어내는 분수가 기다림으로 목을 뺀 가게안의 꽃나무들에게 생기를 준다. 칙...~~ 소리를 내며 퍼지는 빗살의 물포말에 몸을 흔들며 기뻐하는 아름다운 나무와 꽃 사이에서 유라의 하얀손이 율동한다.

물끄러미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나를 흘끝 처다보고는 즐겁게 일에 몰두하는 그녀.
누군가 밖에서 유라를 훔쳐보는 놈이 있다. 누군가 하고 곁눈으로 본다.
앞집 간판집 아들 놈이다. 중학교 2학년 아니면 3학년... 키가 멀쑥하게 크고 얼굴에 여드름이 성글게  
나고 어깨가 딱 벌어져 몸매는 어른 같지만 아직 아이태를 못벗은 사춘소년이다. 
아마도 물을 뿌리는 유라를 바라보는게 분명하다. 넋을 잃고 쳐다보는 놈을 쫒을까 생각 했지만 그러면 걔가 무안해 할 것 같아 가만히 눈을 감고 조는척 해본다.

"빵 드려요 선생님?"

유라가 나를 향해 소리친다. 이 맘때쯤 늘 그녀는 내게 빵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과일과 커피 한잔을 곁들이면 아침 식사가 된다. 나는 손을 저었다. 물주기를 다 마치라는 신호다.

"조금 기다려요. 나무들이 물달라고 난리예요. 얘좀 봐요. 어제 이사온 애가 낮도 안가리고 고개를 들고 물달라잖아요 ㅎㅎ "

나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간판집 아들은 아직도 유라를 주시하고 있다. 내가 저를 주시하고 있는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그래, 워낙 유라가 고우니 그 나이에 뚫어지게 보고 싶기도 하겠지...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휠체어를 밀고 장지 안으로 들어 섰다. 공연히 간판집 아들이 유라를 감상하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건 방조가 아니라 사춘기때 성숙한 여인을 바라 보며 두근 거리는 가슴을 감추면서 숨소리를 죽였던 소년의 추억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안으로 들어와서 눈을 감아 본다. 간판집 아들의 그 연민에찬 눈망울과 유라의 사슴같은 동산과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과 풍만한 자태가 어우러져 괜한 아쉬움을 돋운다.

"참..."

불혹의 나이에 바라보니 더욱 곱고 섹시한 그녀.  순전하기도 하고 요염하기도 하고 잔잔하면서도 남자의 가슴에 파문을 던지는 노랑꽃 같은 여자 유라! 그렇다고 유라에게 내가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녀가 우리집의 월급을 받는 점원이라는 말고 생각으로도 더 이상 그를 넘본적은 없건만 간판집 아들의 그 간절한 눈망울이 오늘따라 내 가슴에 전이된 것인가....

유라는 나를 가족처럼 대해 준다. 아마도 혼자사는 내가 딱해서겠지....
사람구실 못하며 살던 내게 용기 내어 살라고 누님이 차려준 화원. 그리고 그동안 화원의 점원으로 스쳐간 많은 처녀와 아줌마들이 있지만 유라처럼 따뜻하게 나를 대해준 사람은 기억에 없다. 

아무래도 간판집 아들 놈의 유라 훔쳐보기가 어디까지 이르렀나 궁금하여 문틈으로 그쪽을 살핀다.
유라가 호수를 걷어 사리고 그 모습을 아직까지 지켜보던 녀석이 이제 발길을 돌리려나 보다.
유라를 더 볼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일까? 세상이 하 수상하니 괜한 기우가 전을 편다.
요즘 아이들은 워낙 충동적이서 혹시 다른 맘을 먹지 않을까 하는 그런것...

"사장님, 배고프죠?"
"아니.."
"저는 배고파요.."
"그래, 그럼 어서 먹자"

그녀와 난 서로를 훑으며 빵을 입에 넣었다.

"저, 오늘 잠깐 다녀올 데가 있는데..."
"몇시에..?"
"10시쯤.."
"알아서 해"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가 미안한 얼굴을 한다. 미안한 얼굴이 참 사랑스럽다. 내게 저런 여자가 있으면 참 좋을텐데..
하기야 나를 버리고 간 그 여자도 곱기로는 유라 못지 않았다.

2.

" 저 다녀 올께요"
" 응, 편히 다녀와."

그녀가 문을 나선다. 근데 저쪽 편으로 누군가 유라를 보고 서 있다. 누군가. 역시 그놈이다. 간판집 아들 그 놈이다.

"저놈이.."

내 입에서 그런 소리가 툭 튀어 나왔다.

"완전히 빠졌구만 허허"

나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런 눈치를 채지 못한 유라가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것이 보이고 그 놈이 뒤를 따라 가는게 보인다. 괜히 불안하다. 혹시, 정말 저 얘가 나뿐짓이라도 한다면...
그러나 이내 내 근심은 해소 되었다. 유리가 택시를 잡아 타자 걔는 신호등를 따라 횡단보도를 되건너와 제집으로 가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 그렇지 얼굴을 보면 사람을 안다잖아... 간판집 아저씨가 얼마나 사람이 좋은가. 동네에서 가장 인기좋은 아저씨 아닌가. 오가는 사람 술 다사주고 계모임이라는 계모임에 모두 상관하고 그래서 계 때문에 자기일도 제대로 못한다는 심덕 좋은 사장님 아닌가. 부전자전이겠지.
난 담배 한 대를 빼 물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유라의 이쁨이 오락가락 한다. 이상한 아침이구나. 주제를 알아야지...
괜한 잡념을 떨쳐 버려야지 이게 무슨 꼴이람....
담배를 더 깊게 빤다. 가슴을 맴도는 담배 연기가 맘을 삭이려 애르르 쓴다.
간판집 아들놈 탓이라고 위로해 보지만 정당하다는 확신이 없다.

"아,...!"

기지개를 켜 본다. 담배 연기를 동그랗게 말아서 쏘아 본다. 고리가 되어 날아 간다.
고리가 잘 허트러지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온다며 담배연기 고리를 정성껏 만드던 사춘기 시절이 생각난다. 화원안으로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가게안이 쓸쓸하다.
조용히 눈을 감아 본다. 유라와 간판집 아들놈.. 그리고 갑자기 내가 서 있다.
강물이 흘러 간다. 그리고 내몸이 둥둥 떠내려 간다. 그 강가에 서성이는 소년. 그래, 네게도 저 아이처럼 간판집 아들놈처럼 참으로 숨겨둔 추억이 있었지...

3.

내 나이 열서너살 되었을까.    
친구들 보다 좀 숙성한 내 가슴에 어는라 다가온 사건(?)이 있었다.

우리집 바로 앞에 빵집이 들어 서던날
누나랑 가게를 들어서다 난 얼어 붙고 말았다.
빵집 여자때문이었다. 아줌마라고 부르기에는 좀 부자운 스러운 여자.
설흔살은 다 안되었겠지
한번도 그렇게 예쁜 여자를 본적이 없었다.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누나가 툭 때렸다.
빵을 봉지에 싸서 넣어 주면서 말을 건내는 그녀의 미소에 난 남극의 팽긴처럼 뒤뚱거리고 있었나보다.

" 야, 뭐해.."
" 응..."

난 누나의 손에 이끌리어 집으로 돌아 왔다.

"야, 너 그 아줌마 아는 사이냐?"

누나가 나를 다그쳤다.

" 아니.. "
" 그럼 왜 그렇게 혼이 빠지냐?"
" 혼은 무슨 혼. 빵이 하도 맛있어 보여서..."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호감을 살 수 있을까.?
그래 민아에게 환심을 사면 되겠지. 민아는 그녀의 딸인데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난 그 날부터 민아가 다니는 길목을 지켰다. 그리고 우연인 것처럼 접근 했다.

" 야, 너 민아지?"
" 근데 오빤 누구야..?"
" 응, 나..저 앞에 금은방..."
" 아, 저기 시계포..?"

하기야 우리가게는 시계포이지만 가끔 금반지를 팔기도 했다. 그래서 난 늘 자랑이 하고 싶을땐 우리집을 금은방이라고 말하곤 하는 버릇이 있었다. 아마도 우리집을 어필하고 싶었던 내 생각 때문이었나 보다.

4. 

민아 엄마 - 내 혼(?)을 빼앗아간 그녀는 혼자 산다고 했다.
민아 아빠는 무엇하는 사람일까 궁금했지만 확실히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고 민아도 제 아빠는 사우디에 돈벌러 갔다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그후로 민아를 잘 돌보아 주었다. 가방도 들어다 주고 자전거도 태워주고 무엇이든 다 해 주었다. 점점 어리광이 붙은 민아는 나를 데리고 저희 집엘 가자고 했다.

"어, 시게포 총각이구만. ㅎㅎ 착하기도 하지 우리 민아가 그러는데 참 좋은 오빠라고 너무 좋아하더라.."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앉아. 내가 빵 줄게.. 오늘 가게 문닫고 남은 빵이 있어서 좀 가지고 왔지..."

빵이 예쁘게 놓여진 접시도 좋았지만 그녀의 그 긴 손가락과 다소곳이 앉은 모습에 난 자칫 휘청거리는 다리의 충격을 맛보았다.

"아니, 왜 어디 아파?"
"아..아녀요. 하도 빵이 맛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 빵 좋아하나보다. 그럼 내일부터 우리 가게에 와. 시간 있으면 빵도 먹고 나 없을 때 잠깐씩 가게도 봐주면 참 좋지.."

너무도 감격적인 말이었다. 민아 엄마와 같이 있는 시간을 그렇게 소원 했는데 그 소망이 이루어 지다니...
그 이튿날부터 난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빵집으로 갔다. 그녀가 나를 신통하다는 듯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빵을 먹여 주기도 했다.
밥 9시에 문을 닫고 돌아 가는 그녀의 잔심부름 다 해주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내게 서운치 않게 지폐를 쥐어 주기도 했다. 그녀의 손이 닿으면 가슴이 불덩이가 되는걸 참느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눌렀다.

내 방에서 팔베게를 하고 눕는다. 그녀가 어른 거린다. 어림도 없는 연민 속에 빠진 것이었지만 그때는 그걸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빵을 싸주는 그녀의 모습, 시간날때마다 거울을 들여다 보는 모습. 라디오 음악에 따라 노래를 부를때면 정말 목소리마져 그리 곱다니...

날씬한 허리에 풍만한 엉덩이가 아직 영글지 않은 나의 자존을 건드리나보았다. 괜히 일어서서 함성을 지르는 산. 나도 사랑할 수 있다는 궐기가 모아지는 걸 자꾸 느꼈다.
눈을 감는다. 아...민아 엄마.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순영이라고 했다. 난 누구에게 들킬까봐 그의 이름을 "영"라고 정했다. 그리고 낙서를 했다. 수십번도 더 썼다. 그리고 속으로 이름을 부르기를 신음처럼 했다.

"영.."

친구의 이름처럼. 그리운 연인의 이름처럼 난 그렇게 부르며 밤을 보냈다.
챙피한 얘기지만 그때 나의 몸은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였다. 장지 손가락에 억센 털이 솟아나고 수염이 생기고 남자로서의 면모를 갖추면서 봄기운이 폭발하는 시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난 눈을 감았다. 졸리운 여름날의 파리 같은 어둠이 창에 들러 붙는다. 비가 오려나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