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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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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회


BY 올리브 2002-11-12

** 홀. 로. 서. 기. **


<그녀>

유난히 맑은 하늘이 머리위에 떠 있다.
고개를 모로 세워 손바닥을 이마위에 지붕처럼 받치고
저만치 있는 건물을 볼수있게 그늘을 만들었다.
' 저긴가? 호텔은 맞는데...'
최근 몇년 사이에 온 적이없는 터라 쉽사리 눈에 띄질 않았다.
경주...
천년의 역사를 조용히 가슴에 품고 있는 도시
여기 오기를 좋아했다.
집집마다 검은 기와장 밑에는 무슨 비밀스런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는 듯 정겨웠고
보문호를 따라 걷는 산책길에서 호수보다 더 깊은 안식을 받곤했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둥근 기둥과 빛살무늬 외관들이 낯익어 보였다.
' 맞구나...'
소풍날 보물찾기에서 발견한 상품쪽지마냥 내 마음도 설레고 있었다.
"선재아트미술관"
대기업의 아들이 젊은 나이에 미국에서 죽은것을 기리기위해
그의 어머니가 소장한 작품들을 기반으로 설립했다는 장소에 걸맞게
입구에는 아들의 전신초상화가 걸려있다.
이목구비 뚜렷한 건장한 청년이 서있다.
유명 연예인이 이 아들을 닮아 대기업회장이 직접 그를 만났다는 보도를 보고
올때마다 유심히 이 얼굴과 그 연예인 얼굴을 비교해 보곤했다.
부모는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하더니
얼마나 그리움이 깊으면 닮은 사람에게서 자식의 남은 자락이라도
찾을려고 했을까 싶어 올때마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실내를 돌고 기념품코너에서 어머니를 위해
유명작가의 그림이 담긴 접시를 하나 샀다.
이제 이 접시위에 그동안 딸 때문에 기나긴 눈물과 한숨을 걷고
웃음과 행복만 담으시라고...
이렇듯 나 역시 나의 어머니에겐 더 없이 소중한 보물이건만....

어느날,
남편이 집으로 온다는 연락을 받고 옷을 갈아입고
욕실로 가서 화장을 지우려 크린싱크림을 얼굴에 바르는 내 모습을
거울속에 마주하고 있었다.

아.... 난 남편에게 일부러 밉게 보일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젠 정말 남편을 보내야 하는구나.
남자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는 나 자신이
스산하게 노을지는 인적없는 논 바닥에
허름한 옷가지를 걸치고 이리저리 부는 바람에
갈피를 못 잡고 덩그러니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 같았다.
남편은 늘상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만 던졌지
사랑받을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이상 사랑 받기를 포기하는 나.
이별이란 이렇게 사랑하기를 포기할때 완전히 이루어지는것이 아닐까?
사랑한다는 것이 사랑받아야 한다는 절대적인 조건은 되지 못한다.
내 안에 가두며 끝임없이 내 것이라고 소리치는 세상의 모든 부부들
우리는 얼마나 사랑 받을려고 노력하였던가?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더 멋지고 섹시하고 우아하고 고상해질려고 노력했는가.
그리고 끝임없이 나의 편안한 사랑을 상대가 느낄수있게 했던가.
그리하여 내 나의 사랑이 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완벽한 휴식이 되어 고맙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있던가.

화장을 닦아내며
눈물을 닦아내며
미움도 고통도 슬픔도 닦아내며
난 10년의 결혼 생활을 지우고 있었다.

남편과 이별을 생각하고 절망에 나를 오래 담가 두지 않았다.
홀로 일어서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부단히 일했으며
세상에 뒤쳐지기 싫어서 모든것에 관심과 열정을 보일려고 했다.
가꾸지 않는 여자랑 물 주지 않는 장미는 시들기 마련이다.
시들기 싫었다.
어둠의 10년을 보상받으려면 더 이상 늙는 것은 싫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어쩌면 난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장 강하게 확인받는 증명서를 갖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며 욕심내지 않을려고 했다.
사랑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감정이라
가질수도 잡아둘수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냥 나의 편안한 시선속에 그의 영혼을 머무르게 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난 가장 많은 욕심을 내는지도 모른다.
끝없이 그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도록....
그래서 그는 이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참으로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한번의 실패로 난 사랑의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아니, 인생의 기술인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왜 그것을 원하는지를 생각하고
얻기위해서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를.....
의미없이 하루하루를 살기에 난 너무나 소중했다

사랑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이유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나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힘겨운 위안이지만 감사해 한다.
깊은 동굴속에 빛을 잃고 있는 나를 꺼내어 보석처럼 다듬어준
불륜이였던 나의 사랑을....

고운 체에 걸러진듯한 가을 햇살 사이로 그와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다.
두손에는 아이마냥 아이스크림을 들고서....
한 손으로 아이스크림을 건네 받고
나머지손으로는 얌전히 그의 팔에 매달려본다.
부드러운 바람에 실려가 버릴듯한 그의 미소를 냉큼 받아 따라 웃어본다.
흰색 셔츠위로 깔끔하게 면도한 그의 갸냘픈 구렛나루 자국이 푸른빛을 띤다.
아이스크림을 먹을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걸었다.
코발트 빛으로 빛나는 하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지나가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간간히 전해오는 그의 온기.
이 모든 것들을 그냥 느끼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내 안에 둘 수 없는 이 모든것들을.....

그가 나를 보더니 웃으며 물어본다.
" 왜 먼저 나갔어? 우리 깨우지도 않고? 찾느라고 혼났네..."
난 그의 따뜻하고 두툼한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 이렇게 찾아낼줄 알았거든......
기다리고 있었어......
삼십년 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