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비극
일천구백오십년 사월중순경 서울의 숙부님으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전갈이 왔다. 서울에서 같이 장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 때 숙부님은 운혁 아저씨, 박성복, 표광열과 함께 멸치 도매업을 하고 있었다.
학교를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장규익 목사님도 동의하셨고 아버지도 동의를 하셔서 숙부님의 뜻에 따랐다.
멸치도매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청, 원산 등지에서 월남한 여인들이 우리에게서 멸치를 도매로 사다가 방산 시장부터 종로사가 네거리에 이르는 길에 서서 소매를 하는데 한줌이라도 더 팔려고 아우성을 치며 몸싸움까지 벌였다. 대부분 혼자 벌어 오륙 명의 가족들이 먹고사는 경우였다. 나는 그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한줌씩 더 넣어주곤 하였다. 그러자 여인들이 내게만 와서 멸치를 사려하는 일이 생겼다. 동지들은 내게 장사는 냉철해야지 손님이 더 달라 해서 더 주면 이문이 남겠냐고 핀잔을 주곤 했다.
나는 멸치를 파는 일 외에 점포에서 숙직도 해야했는데 겨울밤엔 한데와 다름없는 냉기와 청계천의 시궁창 냄새와 싸워야했다.
장사는 의외로 번성하여 한 주간에 한두 차 분의 분량이 판매되었다. 날이 갈수록 고객이 늘어 모두 즐거운 비명을 울리며 피곤함도 잊고 장사를 했다. 가끔 옛 동지들이 찾아와서 옛날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은 옛이야기들이다.
일천구백오십년 유월 이십오일 주일 아침, 교회에 가려고 준비중인데 라디오에서 놀라운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민군이 서부전선 삼팔선을 넘어와 개성 시를 기습점령 하였다는 소식이었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한 시경 집으로 돌아오니 긴급뉴스가 흘러나왔다. 이북의 인민군이 삼팔선 전역에 걸쳐 넘어와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고 곳곳에서 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으니 휴가 나온 전 장병은 소속부대로 속히 복귀하라는 내용이었다. 뉴스를 들은 숙부님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계시다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전쟁이 확대될 것으로 생각되니 정빈은 지금 봉안으로 내려가거라. 정세가 안정되면 다시 올라오고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봉안으로 내려가겠다. 기차 시간 늦지 않도록 어서 청량리로 나가거라."
저녁인데도 청량리역은 서울을 빠져나가려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겨우 승차권을 사서 원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객차 안은 인민군의 남침이야기 뿐이었다.
개성을 지나 장단을 넘었다느니, 전곡을 지나 동두천에 왔다느니, 춘천에서 국군과 교전하고 있다느니, 진위를 가릴 수 없는 불길한 이야기로 차내가 요란하였다. 기차가 덕소 터널 앞 다리를 지날 무렵 공중에서 비행기 한 대가 급강하하더니 갑자기 기총사격을 가하여 왔다. 기차는 터널 속으로 피신하였다.
기차는 약 이십분 가량 숨어 있다가 터널 밖으로 나왔으나 이내 후진하여 터널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그 비행기가 또 나타나 사격을 해 댄 것이다. 인민군 비행기는 날이 어두워서야 사라졌다.
그 날 밤, 밤이 깊었는데도 공중을 나는 비행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십육일 아침이었다. 매우 조용한 아침이었다. 대문밖에 서서 아랫마을을 내려다보니 평일과 다름없이 조용하기만 하였다. 농촌에서는 연중 가장 바쁜 농번기라 앞뜰 논에서는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노동력을 갖춘 사람은 다 나와 이양하느라고 모를 찌고, 쓰레질하고, 모를 심느라고 분주하였다. 일손이 모자라는 농가는 아랫마을 윗마을 다니면서 일손을 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날 오후 아랫마을 가는 큰길 옆 논에서 아버지를 따라 모를 심느라 모판에서 모를 한줌씩 찌고 있는데 인민군들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들은 나를 보고 소리쳤다.
"동무, 어서 빨리 나와서 해방군을 환영하시오. 젊은 동무!
"네?"
황당하게 서서 아랫마을과 능안 쪽을 바라보니 인민군 탱크부대가 수없이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인민군은 나를 재촉했다.
"동무, 빨리 나오시오."
놀랍고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냇가로 가서 손발을 씻고 또다시 아랫마을을 가르는 신작로 쪽을 바라보니 대포를 장치한 기갑부대가 서울로 한없이 진격하고 있었다. 인민군은 윗말로 갔다
"아버지 오늘은 그만 일을 하시고 집으로 들어가셔서 피난 준비를 하세요. 저는 주막거리에 나가서 부락의 동정을 살펴보고 오겠어요.
나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주막거리로 내려갔다. 거리에는 계속하여 서울로 질주하는 전차부대가 줄을 만들고 있었고 길옆에는 아랫마을 사람들이
"인민군, 만세. 인민군 만세!"
하며 두 손을 들어 환영하고 있었다. 그들의 팔뚝에 둘린 붉은 완장과 그들이 흔들어대는 붉은 깃발을 보니 놀랍기만 했다. 더욱이 우리 마을 사람들을 괴롭혀 왔던 유대길, 이현식 두 사람이 목청 끝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니 가슴이 섬뜩하였다. 그들의 행동을 잠시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어떠하던 인민군탱크가 많이 지나가던?"
아버지가 물으셨다.
"네 그래요 아랫마을 사람들은 벌써 붉은 깃발을 만들어 들고 나와서 인민군만세를 합창하고 있어요. 팔뚝에는 붉은 완장을 두르고요. 야단들이에요."
"붉은 완장은 무슨 표시냐?"
"모르겠어요. 모두 나와서 붉은 완장을 차고 만세를 부르고 있어요."
"어떻게 인민군이 능안 쪽에서 오니? 청평이나 양평에서 오는 것 같다."
"모르겠어요, 서울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서울을 포위하는 것 같아요. 계속 진격을 하고 있어요."
"서울에 인민군이 들어오면 이곳도 안심은 못한다. 피난을 가야 하는데 어찌 하니, 오늘밤만 기다려 보자."
"그래야죠."
이때 마을친구인 강선봉, 최수만 두 사람이 찾아왔다.
"김 동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손도 멈추고 주막에 나가서 만세를 부르며 환영하는데 우리들도 나가서 환영을 해야지. 어서 나가세."
"주막 사람들이 하고 있으니 우리는 좀 기다려 보세."
"모두 나가서 하는데 우리만 이러고 있으면 되겠나. 잘못하면 오해받아요 인민군이 윗마을에 와서 모두 나오라고 야단일세."
나는 매사를 심사숙고해서 처신을 해야 되겠다 생각을 하였다. 강선봉의 뜻은 일단 거절하였다. 밤새도록 생각을 하여도 묘책이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아침상을 물리고 있으려니 강선봉 최수민 두 사람이 또 다시 찾아 왔다.
"오늘 새벽에는 인민군이 수없이 서울 쪽으로 걸어갔데요. 아랫마을 윗마을 모든 사람들이 큰길에 나가서 함께 환영해야죠."
최수만의 말이었다. 강선봉은 나를 주시하며
"보병부대가 지나가니 우리도 모두 나가서 환영을 하세. 우리만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은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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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을 향하여를 올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동안 제가 바빠서 못 올렸더니 많은 분들이 메일을 주셨고 여러가지를 물어오셔서 간단히 설명을 올립니다. 이 글은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오래 봉사를 하셨던 김문일 장로님이 쓰신 글을 제가 퇴고를 도와 여기 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기를 빌며 이만 물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