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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1)


BY 해피콩 2025-06-19

5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오랜 기간 방치했던 치질 수술을 받은 뒤 쉬고
있을 때였다. 퇴원한 지 이틀쯤, 잔변감을 유발하는 통증으로 눕기도
앉기도 힘든 생태로 그때도 오롯이 혼자 견디고 있을 때였다. 
연 끊은 아들과 마음 끓일 뿐 세상일 많은 부모님, 제 삶만으로도 정신없는 
남동생 둘에겐 함구한 병가였다.
대학 생활과 아르바이트로 바쁜 딸은 시간 틈틈이 곁에는 있었다.
만들어 놓은 반찬에 밥 한끼 편히 차려 준 적 없는 딸은 신기할 정도로
한 몸인 듯 내가 아프면 딸도 어딘가 아파하고 힘들어했다.
진통제를 먹고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고 변비인 와중에도 잔변감으로 
화장실을 여러 차례 가야 했고 때마다 좌욕하느라 기진맥진해서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곤 집에 찾아오신 친할머니를 뵙게 되었다. 
 
“**야. 미안하다. 힘들지...? 나를 용서해다오.”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뒤섞인 차분한 목소리. 90세가 훌쩍 넘은 연세의 할머니는 15년 전 마지막으로 뵀을 때의 모습 그대로셨다. 
 
“괜찮아요, 할머니. 저 잘살고 있는걸요. 이제 할머니 원망하지 않아요.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편히 떠나셔도 되세요...”
 
나는 지금도 그때의 그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다. 생각지도 못했던 친할머니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대답을 했고 나의 흐느끼는 목소리로 인해서 잠에서 깼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시간을 보니 새벽 4시쯤. 
뭔 이런 꿈을...돌아 가시려나?
찜찜함에 시간 내서 한번 들려 봐야하나? 확신 없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치매로 오랫동안 요양원에 계신 친할머니를 한 번도 찾아 뵌 적이 없었다.
 
나는 어린 날 부모님 대신해서 우리 남매를 돌봐 주셨던 외할머니 살아생전엔 
어쩌다 찾아뵈었고 종종 통화했고 변비에 도움되는 일제 변비 차를 필요로 하실 때마다 
보내드렸던 살가운 손녀였다. 
잦은 잔병치레로 누워있는 어린 내게,
“아픈 거 할미 다 주고 더는 아프지 마라. 알았지?”
걱정하실 때마다
“응. 할머니 다 줄게.”
선심 쓰듯 흥쾌히 아픔을 선사했었다. 그때의 나는 입버릇처럼 했던 맹세가 있었다.
“할머니,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세계여행 시켜줄게~!”
외순주를 위하느니 방아 괭이를 위하랬다는 옛말을 당신의 손을 거쳐서 성장한 
외손주들의 무소식에 섭섭해하실 때마다 하셨다. 그런 할머니를 위로하듯 
눈치껏 했던 말이지만 순간의 나는 진심이었다.
 
“할머니 죄송해요. 해외여행 보내준다고 호언장담 했는데...시간이 더 필요할 듯하네?”
“너나 부디 아프지 말고 잘 살아라...”
죄송함을 전할 때마다 오히려 나를 걱정 하셨던 외할머니는
83살 되시던 해에 생신상 잘 드시고 쓰러지셔서 이틀 후 돌아가셨다. 떠나시는 
순간까지도 기억력은 자식, 손주들보다도 좋으셨다. 
외할머니와 추억들은 기억력 쇠퇴 중에도 어제처럼 또렷한 일화들이 많다.
 
하지만...친할머니 존재는 내게 있어 명칭일뿐 불편한 이웃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몽사몽에 친할머니를 뵌 날 새벽 6시쯤 됐을까?
불면증 딸에게 이른 시간에 전화하는 법이 없는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딸래미 자는데 깨웠지? 니네 할머니..."
”돌아가셨어?“
엄마의 말씀이 끝나기 전에 대꾸하니 오히려 엄마가 당황하셨다.
”어떻게 알았어?“
”꿈인 줄 알았는데...새벽에 할머니 다녀가셨어.“
”뭐어? 뭐라시디?“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용서 해달래....“
”그래서 뭐라고 했어?!“
”걱정마시라고 원망하지 않는다고 편히 가시라고 했지.“
”...양심은 있는가 보네...“
엄마는 여전히 할머니께 맺힌 마음을 풀지 못하셨다. 할머니 부고 소식에 
어쩔 수 없이 치질 수술을 고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도 무뚝뚝하셨던 할머니 살아생전에 내가 한이었을까? 꿈에도 몰랐다. 
내가 어릴 적. 당시에 
서울, 상계동 달동네에 사셨던 친할머니는 봄이나 가을쯤 1년에 1~2번은 
아들네인 우리 집에 내려오셨다. 방문할 때마다 막대사탕 하나 주신 적 없는
할머니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 안에 담긴 몇 개의 보자기가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