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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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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을 바꿔주마


BY 이루나 2021-03-04


 대체 생일을 몇 번을 하는지 복이 터졌다.
작년에 육순이 되던 생일날 지인들과 횡성 태기산을 갔었다. 우리를 안내한 언니가 그 산에는 겨울에 나는 냉이가 지천이라 했었는데 막상 가 보니 하얀 설경이 입구부터 장관이었다.
폰 으로 사진을 찍으며 환호하다가 아름다운 설경을 친구에게 전송했더니 네 생일선물인가보다 하기에 또다시 마음이 심란해졌다.
설경에 취해 기분이 멜랑콜리 하여 “ 오늘이 제 육순 생일인데 하늘에서 선물을 받았어요” 하자 모두 그러냐며 축하를 전한다. 하산길에 같이 간 회장님이 생일축하로 점심을 사주신다기에 감사히 먹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소파와 한 몸이 된 채 하루를 보낸 남편이 아침과 똑같은 자세로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꽃 한 송이, 와인 한 병 아니 소주 한 병이라도 사놓고 기 다릴만 한데 아는지 모르는지 아침에도 저녁에도 아무런 말이없다.
샤워를 하고 어제 끓여둔 미역국에 밥을 한술 말다가 거실 장에 들어있는 와인 한 병을 꺼내어놓고 혼자 마시다 보니 기분이 영 별로였다. 가족 단톡방도 딸과의 톡도 조용한 전화기를 슬며시 열어서 열흘 전에 유럽여행을 떠난 딸에게 카톡을 했다. “오늘이 엄마 육순인데 전화는커녕 톡도 없고 이제 나도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하구 살란다. 흥 칫뿡 ” 하고 메롱이 이모티콘을 날렸다. 조금 후에 보이스톡으로 전화가왔다. 심한 감기로 겨우 나오는 목소리로 하는말이 파리에서 로마로 부친 화물이 피렌체에 가 있어서 옷도 못 갈아입고 이틀 동안 화물 찾으러 다니다 감기는 잔뜩 걸린 최악의 상태인데 왜 엄마까지 그러냐 하며 징징 운다. 가슴이 철렁해서 얼마나 아픈거냐? 묻는 말은 대답도 없이 언제는 12월 2일이라 했다가 또 뭐 19일이라 했다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며 화를 내더니 전화는 끊어지고 다시 보이스톡을 해도 받지 않았다.
 12월 2일은 그저 주민등록상 나와 있는 기록이고 그것을 생일이라 한 적은 없었다. 양력으로 생일을 챙기는 아이는 당연히 주민증에 나와 있는 날짜가 생일이지만 옛날 사람인 나는 주민등록과도 일치하지 않는 기억 속의 생일이 존재한다. 어머니는 음력으로 12월 19일이라 말했었지만 한 번도 생일을 챙겨 주거나 기억해 주지 않았다. 그걸 양력으로 환산하는 것이 헷 갈리고 많이 어려웠나 보다. 톡 으로 병원에 가라고 돈이 떨어졌으면 부쳐 주랴고 겨우 달래어놓고 불편한 밤을 보냈다.
 며칠 후 귀국한 딸이 집에 돌아오면서 현지에서 구입한 숄과 화장품을 건내며 어색하게 웃는다. 엄마도 젊었을 때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 하는게 많이 헷갈리더라며 지금처럼 그냥 양력으로 하면 늘 사용하는 날짜이니 헷갈릴 일도 없으련만 옛날 사람들은 모두 음력으로 기억을 해서 이야기를 하니 때로는 나도 불편했었다. 해서 “생일을 바꾸어 주마.” 말하니 “우와 울 엄마 생일 챙겨 먹을라고” 하며 웃는다. 네가 기억해야 이담에 네 남편도 아이들도 기억해 줄 거 같다. 세상이 변했는데 언제까지 음력만 고집하는 것도 그렇고 합리적인 선택하면 서로 편하고 좋잖아. 주민등록에 나와 있는 날이 좋겠지? 기억하기도 좋겠다. 이렇게 생일을 바꿨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12월 2일이 평일이니 전 주말에 오겠다는 딸의 전화에 그러자고 해서 11월 28일에 집에서 간단하게 먹는데 남편이 오십만 원이 든 봉투를 내밀며 쓰라기에 감사히 받았다. 서울로 올라간 딸이 12월 2일 점심시간에 전화해서 “생일 축하해” 하는데 왠지 어색했다. 어머니의 기억에 의지한 섣달 열아흐레 밤 8시쯤이라는 말을 60년을 기억해서 살아서일까?
 섣달 열아흐렛날이 밝았다. 
가족들과의 단톡방에 환갑을 축하한다는 언니의 문자가 떴다. 11월28일에 이어 12월2일에 또 1월 31일인 오늘까지 무려 3개월에 걸쳐 생일축하를 받고 있으니 참으로 복이 터졌다.
 그날은 여행이나 가자던 내 말을 들었는지 먹었는지 전날의 과음으로 비몽사몽인 남편을 뒤로하고 집을 나와 차에 시동을 걸고 미리 계획했던 여행지인 제천 의림지를 내비게이션에 찍었다. 120km O.K 달려라.
의림지에 도착하니 겨울이라 삭막한 풍경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멋있는 호수였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차에 올라 “ 청풍호반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왕복 15.000을 내고 표를 끊고 올라가니 코로나로 인해 일행이 아니면 함께 태우지 않아서 12인승을 혼자 타는 호사도 누렸다.
산꼭대기에서 내린 후 전망대로 올라가자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절경이었다.
사방이 호수이면서 점점이 떠 있는 땅과 가옥들을 보니 지형이 특이하고 아름다웠다.
다시 내려와 오늘의 마지막 코스로 일몰이 아름답다는 정방사로 향했다. 
 스님이 생필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올라가는 산꼭대기에 바위를 등진 채 자리한 절을 T.V에서 보면서 언젠가 한 번 꼭 가 보아야지 했었다.
교행은 안 되고 일방통행만 되는 시멘트 길을 따라 산속으로 한없이 올라가는데 어랏 내려오는 차를 만났다. 조심스레 후진하며 얼마를 내려가서 겨우 마주 달리고 다시 올라가는데 한없이 이어지는 산길이 더럭 겁이 날 즈음 시멘트길 위로 “ 정방사 차량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보이고 우측으로 주차공간과 함께 산속에 주차된 차들이 보였다.
일단 주차를 하고 주변을 둘러봐도 절은커녕 그럴만한 아무런 표식도 없었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주차된 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어디로 가야 하나? 혹시 잘못 온 건가?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도 없고 난감했다. 일단 출입금지 팻말 위로 난 시멘트 길을 따라 올라가 보기로 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시멘트 길이 끝나는 즈음에 스타렉스 한 대가 서 있고 스님 한 분이 그 차에서 물품을 내려 지게에 올리더니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스님의 뒤를 따라 오르는데 내 인기척을 느끼셨는지 뒤를 돌아보기에 인사를 하고 손에 든 것을 제가 들고 가겠다 하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올라가라 손짓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 드디어 정방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웅장한 바위 아래 고즈넉이 자리한 정방사는 마치 바위와 절이 원래 하나였다는 듯 물아일체의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아래 어딘가에서부터 울컥 올라오는 마음을 다스리며 한참을 서 있었다. 마음을 고르고 절 마당에서 내려다보니 산과 하늘이 절 아래에 나붓이 엎디어있다. 이 마루에 절을 지으신 그분이 누구였을까? 그분도 버려야 할 그 무엇이 무척이나 많았었나 보다. 나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 하는가? 나는 언제쯤 무겁고 무거운 이 마음의 갑옷을 벗을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오늘이 어머니가 알려준 60년의 마지막 생일이구나? 그렇다면 내일부터는 나의 1살이 다시 시작 되는 것이니 여기서 다 버리고 다 벗고 가자
60년을 버리고 다시 시작하자. 절 지붕과 소나무 사이에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그러라고 한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천국에서 하산했다. 이제 나는 1살이다.
이제 내게 20년 남짓의 시간이 남았다.
성년이 되는 시간만큼 더 깊어지고 옹이는 나이테만큼 단단해 질 것이다.
마음은 거칠어지지 않게 입은 칼처럼 조심스럽게 행동은 신중하게 생각은 깨어있게 아름다운 성년이 되기를 소망하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