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취업을 했다.
내가 일하는 곳은 나라에서 월급을 주는 곳이라 다니는 동안은 공무원이나 마찬가지지만
비정규직이라서 일년 일하고 삼 개월이 지나야 다시 재취업을 할 수 있다.
다시 취업하기가 참 너무 어려운 곳이라
이력서 내고 면접보고 하는 과정이 굉장히 떨리고 힘에 부친다.
이곳은 여자라면 누구나 취업하고 싶어하는 곳이라
경쟁률이 엄청 세고 안된 사람들은 왜 안됐냐고 골고루 혜택을 줘야 하지 않느냐고
시청에 항의를 해서 시청에서도 골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누구나 취업을 할 수 있게 열어 놓은 상태라 한두 명 뽑는데 이삼십 명에서 오십 명이
서류를 내기 때문에 이번에도 재취업하기가 참 힘들었다.
젊은이뿐만 아니고,
사오십 대들도 취업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엄청 많다는 게 우리나라 현실이다.
자식들 어느 정도 키워놓고 이제 돈이나 벌어볼까 하고 나서지만
사실 집에만 있다가 나이 들어 취업을 하려고 하면 보람되면서 일하기 깨끗하고
인정 받고 그럴만한 일터가 터무니없이 좁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나이든 나를 그냥 위로하기 위한 말이다.
현실 속에 직장을 구하려고 들면 통과하기 제일 높은 벽이 나이 때문이다.
월급을 주는 입장에서 한살이라도 젊은 사람이 좋지 사오십 먹은 아줌마가 좋을리없다.
내가 월급 주는 사람이거나 팀장이거나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
젊은 사람이 일도 잘 배우고 눈치도 빠르고 어려야 지시하기도 좋지
나이 먹으면 머리도 빠릿하게 돌아가지 않고, 몸도 굼뜨고,
일 눈치도 느리고(쓸데없는 눈치는 엄청 빠름) 지시할 때도 어렵지 않겠는가.
이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다행히도 이곳은 대부분 아줌마들이 일을 하는 곳이라
아줌마라서 안 뽑아주지 않는 게 아니고
취업하고 싶은 아줌마들이 너무 많아서 취업하기가 어렵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내가 일하는 곳이 어딘지 밝히지 못하는 것은
이곳에 있는 더럽고 비리투성이들을 솔직하게 쓰다 보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곳에서 일하지 못할 때가 오면 솔직하게 밝힐 예정이다.
9월부터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
오 개월 쉬는 동안 일하는 방식도 많이 바뀌고,
신경 쓸 일도 많다 보니 글 쓸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 동안 글을 자주 쓴 것은 일년계약 만기가 끝나
자원봉사를 하고 있을 때(무보수로 하루 네 시간만 일하고 있었음)
시간이 많아서 글을 쓸 수 있었다.
일이 많고 복잡해져서 출근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일터로 나간다.
아침 공원길에 백일홍 나무 꽃을 휘리릭 보고,
차창을 스치는 시골길을 지나 출근을 한다.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안내대 반장님이 나를 보고 눈이 동그래진다.
오십 넘은 아줌마라서 하나를 가르쳐주면 두 개를 까먹는다.
오십 넘은 아줌마라서 일을 처리하면서 세네 번 확인을 해야 돼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
컴퓨터가 해준다고는 하지만 사람 손과 사람 눈으로 확인해야 할 일이 많다.
실수를 하면 여러 사람이 나로 인해 힘들어지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한 시간 일찍 나가서 천천히 일 처리를 해야 내 마음도 편하다.
이년 전부터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바뀌고 있다.
나도 될듯하면서 운이 안 좋아 빗겨갔다.
사실 일을 잘해서 정규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윗사람에게 잘 보이거나 윗사람 입김이 있어야 정규직이 된다는 소문이 있다.
직접들은 얘기가 있다.
“성실이 일한다고 정규직 안돼. 같이 술 마셔주고 노래방 가주고 같이 놀아줘야 된다고.”
내가 아는 사람 세 명이 정규직이 됐는데, 일 잘하는 것 하고는 관계가 없었다.
정규직 제도가 생기면서 살벌해졌다.
같이 일하는 사람을 밟아야 내가 될 수가 있고,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만 될 가능성이 높아서 서로 눈치를 본다.
약한 사람에겐 강하고, 강한 사람에겐 약해야 하는 먹고 먹히는 사회.
정규직이 없었던 몇 년전만해도 이곳은 정이 많았고, 서로 헐뜯지 않았고,
서로 밀어내려고 야비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기회주의자가 정규직을 거머쥐다 보니 살얼음판에 서 있는 기분이다.
난 오늘도 아침 일찍 싱싱한 공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출근을 한다.
내 주어진 길은 넓거나 높지 않다.
좁고 거칠더라도 나는 씩씩하게 오늘을 산다. 내 소박한 꿈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