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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년기가 왔다


BY 편지 2015-03-15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게 느리고 흐릿하게 시간이 간 것 같은데, 갱년기가 왔다.

염색을 하지 않으면 흰머리가 해빙기의 산등성이 같이 지저분하고,

어깨는 시려 코만 내놓고 이불을 끌어 덮고, 발은 뜨거워 이불 밖으로 꼴사납게 내 놓게 된다.

볼살이 쳐지고 표정주름이 또렷해서 안 웃고 있으면 화났냐고 물어봐서

억지로 입가를 올려 붙여가며 표정관리를 하려고 애쓰고 있다.

 

가려움증이 생겨 일하다가도 다리가랑이를 벅벅 긁고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속옷을 훌렁 걷으며 등을 긁고

눈가와 입주변이 가렵고 각질이 일어나 화장을 안 했더니 좀 덜 가려워졌다.

늙어가는 얼굴에 화장도 못하니 핏기도 없어 보이고, 누가 나를 보면 어디 아프냐고 물어볼까 봐

볼 터치와 자극이 없는 립글로스를 출근할 때 어쩔 수 없이 바르는데, 그게 참 곱지 않겠지만

병자 같다는 소리 듣기 거북해 내 만족으로 얼굴을 들고 출근을 하고 있다.

 

오줌도 자주 마렵다.

외출을 할 때면 화장실 먼저 챙기고, 도착해서도 화장실이 어디 있나 확인하게 된다.

갱년기 되니 배에 힘이 들어가면 오줌이 찔끔 나온다.

그나마 오줌 보를 자주 비워야 예방을 할 수 있어서 더 자주 화장실을 찾게 된다.

 

옛날에 내 별명은 '이여행'이었다. 여행을 많이 좋아해서 누가 여행에 자만 나와도

호응이 좋으니 내 성을 붙여 이여행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이젠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일단 예민한 것이 더 예민해져서 잠자리가 불편하면 밤을 꼬박 새우고,

화장실 자주 가야하고, 무엇보다 여행에 대한 흥미도 감흥도 잃게 되었다.

이것이 갱년기 때문인지, 성격 탓인지, 주어진 환경 때문인지 몰라도 이젠 여행에 자만 나오면

멀리 가는 건 피곤하고, 등산은 고생스러워 엄두도 못 내고,

일박은 여러 가지로 불편해서 생각조차도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하고만 가까운 곳으로 꽃과 자연을 보고 맛있는 거 사먹고,

아침 일찍 출발하지 않아도 되는, 차 타는 시간을 두 시간을 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된다.

어디 꽃 볼 수 있는 곳으로 함 나가볼까?” 하면서 4월이 되어서야 여행을 갈 것 같다.

집에서나 일할 때 여행 책을 많이 본다.

우리나라 구석구석, 세계 여러 나라를 앉아서 편하게 갈 수가 있어

갱년기가 되면서 여행 책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앞으로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은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이 많고 자연이 어우러진 가까운 일본과

알프스 산맥을 올라가는 산악기차를 타고 야생 꽃과 푸른 초원이 펼쳐진 스위스지만

못 가게 되더라도 여행 책을 보며 만족하기로 했다.

 

갱년기가 되니 남자에 대한 욕구도 완전 없어지고,

이건 갱년기 전에도 없는 편이었지만.

십년전에 서로 호감이 있던 남자가 내게 이런 말을 물어봤다.

남자 생각 안나요?”

아니요. 괜찮은데요.”

그 뒤 그 남자는 내겐 연락을 안하고, 내가 알고 있는 여자와 금방 엎어졌다고 들었다.

중년의 남자에겐 무엇보다도 육체적인 사랑이 중요한데

남자 생각 없다는 여자와 피곤하게 실랑이할 필요로 없이

그 여자와 금방 휘딱 엎어졌겠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갱년기가 되니 말안통하는 남자와 차 한잔 마실 맛도 안 나고

억지로 대화를 이어갈 필요성도 없어졌다.

혼자가 편해내가 사십 대 때 주변에 나보다 나이든 언니들이 이 말을 많이 하더니

요즘 내가 이 말이 저절로 나온다.

남자 만나봤자 걸리적거리고 신경이나 쓰이지 지금이 편해.”

 

흰머리 벗꽃잎처럼 흐드러지고,

온 몸이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근질거리고

손발이 아궁이에 불 땐 것처럼 바닥이 화끈거리고

얼굴도 피부도 윤기가 없이 늘어지고

조금만 힘들어도 팔다리허리가 아프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우울해질 때가 있다.

 

앞으로 모자 속에서 비둘기가 나오는 마술 같은 현실은 있을 수 없다.

늙어가는 증세를 받아 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까지야 뭐,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걸 애타게기다려봤자 나에게 남는 건 허무뿐.

보무도 당당하게 왔던 길을 계속 걸어 내 속도 대로 갱년기를 걸어야 한다.

흐리고 느리지만 그래서 희망이 반으로 줄어들고 꿈도 이뤄질 것 같지 않지만.

뭐 바라는 게 있어요? 내게 물으면

허공높이 빈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상을 그득 담은 목소리로

시골 가서 내가 키우고 싶은 꽃 키우며, 책 읽으며, 글 쓰며 살고 싶어요.”

그럼 어디로 가느냐고 내게 물으면?

금방, 딱히 대답은 나오지 않겠지만

계절이 가고 오듯이…. 그래서 행복하다.” 대답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