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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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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옛날이여


BY 그대향기 2015-02-17

 

그저께 전화로 주문했던 떡을 미리 찾았다.

할머니들이 좋아하시는 팥시루떡과 찹쌀 모듬떡 그리고 떡국

시골 떡방앗간은 인산인해라 그러면 좀 과한건가?

떡방앗간이 신축건물이라 꽤 너른데도 장마당 같았다.

 

한쪽에는 가래떡을 연방 썰어서 가마니에 담아서 주문자의 이름을 적었다

몇 말씩 하는지 자루가 불룩하다.

설에 고향을 찾는 아들 딸들 나눠 주려는지 많이들 하신다.

떡 시루에는 수증기가 숨가뿌게 푹푹 올라오고 주인부부의 손놀림은 거의 기계적이다.

 

도시의 떡방앗간은 어떨지 모르지만 시골은 그래도 농사지은 쌀로 자식들 해 먹이느라

명절 떡방앗간은 며칠 동안 새벽 잠 설치며 떡을 해 내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한다.

떡삯을 받아 넣는 빨간색 바께스가 지전으로 수북하다.

진작에 떡만드는 기술이라 배워둘걸...ㅋㅋㅋ

 

어릴적에 설이나 추석 며칠 전에 엄마 손을 잡고 재래시장 옷 집을 갔다.

빨간 나팔바지에 반짝이 티셔츠나 인조털이 달린 모자달린 잠바를 사면

미리 못 입게 하고 옷장에 넣어두고 꼭 설날 아침에 꺼내 주시곤 했다.

밤마다 꺼내 입어봐도 절대로 설 전에는 허락을 안하셨다.

 

오빠만 넷인 집이라 언니 옷을 물려 입은 적은 없는데

엄마는 아이다운 옷을 사 주신게 아니라 늘 숙녀복 비슷한 걸 사 주셨다.

우리 어릴 적에는 지금처럼 아동복이 다양하지도 않았다.

메이커는 기억에도 없다.

 

부르뎅 아동복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우리 아이들 적인지 내 어릴적인지 헷갈린다.

지방 소도시에 무슨 큰 메이커가 있었겠는가만은 그래도 행복했다.

지금이야 온갖 메이커가 지방에도 다 들어 와 있는 마당이고

엄마들이 인터넷이다 홈쇼핑이다 정보들이 빤하다.

 

그 땐 수제 편물로 옷을 맞춰 입기도 했다.

요즘은 니트다 뭐다 해서 값이 꽤 비싼 편이다.

딸이 하나다 보니 편물하는 집에 데려가 몸 치수를 재고 며칠 있다가 가봉도 하고

없는 형편에도 엄마는 옷을 맞춰 주시기도 했다.

 

초등학교 일학년 입학식 사진에도 보면  그 때 입었던 편물 옷이 보인다.

비록 흑백사진이지만 분명히 기억하는 건 빨간 옷에 하얀 옆선이 보이는 그 옷

주머니가 사선으로 두개 있었고 어깨선이 꽃봉우리 같이 볼록했다.

입학기념으로 해 주셨던 그 옷, 봄소풍 때도 입었던 그 옷.

 

요즘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필요할 때 마다 새 옷을 사 입혀서

명절이라고 굳이 새 옷을 사 주지 않아도 하나도 안 섭섭해 할 것 같다.

필요하기도 전에 사다 주는 자식에 관해선 늘 부자인 부모가 있는데 뭐가 아쉬울까?

먹거리들도 차고 넘쳐서 살 찔까 봐 줄여야 할 판이고.

 

엄마가 명절 장을 봐서 벽장에 숨겨 놓고 나가시는 날에는

미리 먹고 싶어서 오빠나 내가 엎드리고 벽장에 기어 올라가서 야금야금 훔쳐 먹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안 들키리라 생각하고 훔쳐 먹지만 엄마가 왜 모르실까?

아시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신거지.

 

곶감은 하나 둘 빼 먹다보면 어느 날 한꼬지가 몽땅 없어져 버려 황당한 적도 있었다.

한개만 두개만 꼭 하나만 더 하다가보면 한꼬지가 홀라당~

단술이라면 설탕 물을 더 타 보충하면 되지만 곶감은 꽤를 쓸수도 없다.

그래 아예 다 먹은 빈꼬지를 없애버리고 원래 하나인 걸로 해 두자.

 

엄마는 설 당일 큰 댁에 보내는 보따리를 싸면서 눈치 채셨을건데도

올 해는 곶감이 비싸 적게 보낸다고 큰엄마한테 일러라고 하셨다.

오빠하고 나하고 뒤에서 눈짓으로만 힐끔힐끔 아버지한테 들킬까 봐 조바심내고.

우리는 그런 어린 날이 있었지만 우리애들은 그런 면에서는  풍족한 편이다.

 

얘들도 더 큰 어른이 되면 오늘이 부족했고 아쉬운 어린 날로 추억될까?

일년에 한두번 있을까 말까한 외식에도 충분히 행복했던 엄마세대의 어린 날과

무슨 날만 되면 핑계삼아 외식을 하는 우리애들하고 어느 것이 더 오래 기억될까?

행불행을 떠나 추억삼아 꺼내 보고픈 날이 어느 것일까 살짝 궁금하기도 하다.

 

할머니들하고의 명절 아침을 위해 시댁방문도 친정나들이도 뒤로 밀려 난 생활

그러나 친척들도 이젠 의련히 그러려니 하고 이해를 하니 편하다.

어머님이 부산으로 이사를 가신 덕분에 느긋하게 시댁에 갈 수 있고

여러가지 명절증후군에서도 해방된 민족이 되어 나름 행복한 며느리다.

 

시댁에 들고 갈 선물보따리 여러 개와 어머님 드릴 용돈을 챙기고 

가까이서 수고하는 형님네 드릴 선물도 챙긴다.

자가용이 귀하던 시절에는 애들 손 잡고 선물보따리에 기저귀가방까지

만원버스에 흔들리며 이고지고 부산으로 갔던 날도 있었다.

아~

옛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