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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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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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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AIR...여성시대 신춘편지쇼 금상수상


BY 비단모래 2013-07-08

91년 그 봄

봄은 왔지만 내마음에는 봄이 찾아오지 않았다.

서른세살...황금같은 나이 임에도 나는 절망의 늪속에서 허우적 거렸다.

작은아들이 태어난지 28일만에 급성골수염으로 다리뼈를  수술한 후

성장판을 다쳐 다리가 휘어지는 바람에 돌지나 한번 그리고 또 세번째 수술을 한 후였다.

 

아이는 열여덟살..성장이 다 끝날때까지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고

키가 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선고는 나를 엄마라는 이름속에서 고통스럽게 했다.

엄마라는 이름

엄마는 아이의 아픔을 달래고 대신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지독한 마취에서 깨어나 통증에 시달리는 아기에게

아가 조금만 참아봐 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엄마였다.

 

82년에 태어난 작은 아들

91년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봄도 아들은 다리수술로 통기브스를 하고 길게 누워있었다.

빼꼽하고 엉덩이만 동그랗게 뚫어놓고

딱딱하게 얼어 굳은 눈사람마냥 그렇게 굴러다녔다.

 

누워서 밥을 먹었고 대소변을 보았다.

그런아들과 집에서 씨름하면서 간간 엄마라는 직책에 사표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들이 나를 살게하는 이유도 되었다.

어린아들 손을 잡고 낯선 서울길로 가서 아무도 모르는 병원에서 수술받고

대전으로 내려오고 하는 일상

새벽 7시50분 기차를 타고 어린아들의 손목을 잡고 찬바람 부는 서울거리를

걷는다는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

끝도 보이지 않는 이싸움을 언제까지 해야할지 막막한 구름처럼

서울거리를 떠다녔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병원에서의 서러움이란 일일이 말할 수 없었고

더 무서운건 이 어린아들이 병원에 도착하면 아무것도 먹지않고 말도 안하고

내 손만 꼭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손이 유일한 피난처인 아들을 수술실로 들이밀고 열시간 이상을 수술실 밖에서

울며 기다려야 하는 그 시간들의 두려움을 아들은 알고 있었다.

엄마 손을 놓으면 끌려가는 수술길

그 길고  먼 길을 가지 않으려면  엄마손을 놓지 않아야했다.

 

라디오에서는 갖가지 사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당시 나의 유일한 낙이란 라디오를 듣고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내 사연이 방송될때 함께 울고 하면서 지냈다.

라디오 듣는것이 세상과의 소통이었다.

 

 4월이면 서울엠비시 여성시대에서는 매년 신춘편지쇼를 개최한다.

그해의 글제가 얼굴이었다.

나는 펜을 들었다.

그당시 컴퓨터를 쓰지않을 때라 손편지로 \'나를 기다리던 해바라기 같은 얼굴\'이란

제목으로 신춘편지쇼에 응모를 했다.

그리고 잊었고..때로는 가슴 두근거리며 발표를 기다렸다.

 

금상당선...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울었다. 엉엉 울었다.

누군가 내 삶의 팍팍한 시간을 위로해 주었다는 느낌이었을까?

그냥 몇시간을 울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얼마 후 용인자연농원에서 시상식이 있었다.

남편과 큰아들 그리고 통기브스를 풀고 재활치료를 하는 작은아들,친정엄마를 모시고

자연농원엘 갔다.

거기서 상을 받고 가수들이 출연한 공개방송을 보고 아이들과 튤립밭에서 사진도 찍고

그야말로 나의 날이었다.

 

이튼날은 여성시대 생방송에 남편과 출연했다.

글을 참 잘썼다는 칭찬을 들은 것같다.

심사위원분들이 내 글을 읽으며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해 첫 시집 \'아이야 우리 별 따러 가자\'라는 시집을 냈다.

아이의 투병일기를 정리해 시집으로 출간한 것이다.

각 여성잡지에서 취재를 나왔다.

TV..라디오 출연신청이 들어왔다.

 

서울방송국 여러곳에서 촬영을 나왔고

내가 다니는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나오고 그리고 출연했다.

 

그 계기가 ...나를 방송작가로 만들었다.

 

눈물로 키운 아들이 엄마를 시인으로 만들었고 방송작가로 만들었다.

그후 아들은 몇번의 수술을 더했다.

열 여덟살까지는 아니었지만 총 여덟번의 수술을 했다.

 

돌아보니 흘러간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

그 아들이 지금 남자간호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간호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혼해서 예쁜 손녀도 둘이나 안겨주고 예쁘게 가정을 꾸려가고 있으니

나는 지금 행복하다.

 

두번이나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그래서 연탄박스를 방안에 들여놓고 잠들려 할 때도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던 그 순간에도

엄마....하고 부르던 아들... 그아들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 살았다.

 

그때의 상처가 나를 다시 살게 하는 힘이 되었고  그시간들이 나의 험난한 길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응원의 깃발이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눈부시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