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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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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보낸 생활 소품들을 받은 김에 ~


BY 이안 2011-10-27

          


 

택배가 왔다. 주문한 것도 없는데 택백기사가 자그마한 상자를 건네준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핀다. 글씨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안경을 끼고 살펴도 내 주소와 이름만이 눈에 들어온다.

 

빈틈없이 붙인 테이프를 뜯어낸다. 안에서 핀 같은 게 보인다. 그제서야 원주에 사는

친구가 보낸 핀이라는 걸 알아챈다. 다시 주소가 쓰인 곳을 보니 내 주소 밑에 짧게

친구의 주소가 보이고000 공방이라는 브랜드도 보인다. 이어서 여름 무덥던

어느 날 통화를 하던 중, 자신의 작품들을 강원도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상품화하게 됐다며 보내주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녀와 통화를 할 때만 해도 머리가 제법 길었었다. 그래서 핀을 꽂든가 고무줄로

묶든가 해야 했다. 머리가 기냐는 말에 그렇다했더니 상품화한 자신의

브랜드 핀을 보내주겠단다.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 말은 시간이 흐르면서 내 기억속에서 사라졌다. 얼마 전 짧게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해버렸으니 말이다. 그 말이 생각이라도 났더라면 망설이기라도 했을 텐데

난 머리를 자르면서 망설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머리를 기를 처지도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머리카락이 약해져

빗질을 하거나 머리를 감을 때면 우수수다. 노안으로 탄력을 잃어가는 내 눈에도

제법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게 자꾸 신경이 쓰여 이제는 아예 머리를

기르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까지 해 놓은 상태다. 그런 상황에 상자 안에서 쏟아진

대여섯 개의 핀이 허망하게 눈에 들어온다.

 

전화를 해야 하는데 뭐라고 말을 하나? 내게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핀일지언정

생각해서 보내준 거니까 그냥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뭐라도 하나 사줘야 하나.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연결하고 검색어 쓰는 부분에 친구의 브랜드를 입력하고

엔터기를 누른다. 그리고 사이트를 열어 확인한다. 자그마한 새로운 제품이 있으면

하나 구입할까 해서다. 헌데 음악이 깔린 거 외에는 달라진 게 없었다.

새로운 제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화를 하면 그녀는 한 번 오라고 말하겠지. 그 말을 밀어내는 것도 조금은

부담스럽다. 이미 여러 번 밀어냈으니까. 4시간 이상을 달려야 하는 거리도,

갔다가 그냥 돌아나오는 것도 모두 쉽지가 않다. 내가 산다면 핀 같은 건 아니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일 텐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그녀가 공방을 열고 얼마 안 되어 방문했을 때, 이미 난 육십만 원을 주고 작은 탁자

하나를 샀었다. 비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하나는 사주는 게 도리지 싶었다.

자신이 나중에 유명해지면 값이 더 많이 나갈 거라는 그녀의 말 때문은 아니었다.

난 고가의 작품에 열을 올리는 수집가는 아니다. 난 그냥 평범한 생활인일 뿐이다.

그래서 난 값비싼 제품을 덥썩덥썩 사는 그런 것에는 즐거움을 못 느낀다.

 

값이 비싸다는 말을 슬쩍 흘려보기도 했다. 그녀는 수입목의 단가가 워낙 비싼 데다

수공값도 있어서 값을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단다. 나중에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면

값은 더 올라갈 거라면서. 그녀의 말에 난 고개만 끄덕여 줘야 했다. 자그마한 것도

100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제품을 덥썩 사줄 그런 상황은 아니기에.

 

물건을 들일 때는 구색이 맞아야 한다. 하나를 사면 거기에 맞춰서 다른 것들도

구입하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다. 그러자면 가구 들이는 값이 만만치 않다.

소박한 내 삶과는 거리가 느껴진다.

 

그녀는 가끔 전화를 걸어 놀러오라는 말을 아주 가볍게 한다. 내가 명퇴를 했다는

말을 들은 이후에는 전화를 거는 횟수도 늘어났다. 난 나중에 시간 나면 한 번

가겠다는 말로 번번이 밀어낸다.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고 가고 싶은 걸 작품을 사줘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애써 참는 것도 아니다.

언제부턴가 떠남에 대한 욕구가 내 안에서 잦아들었다. 내 아파트 거실이나

서재에만 있어도 떠남에서 얻을 것들이 모다 충족이 되는 내 삶이 애써 또 다른

자유를 꿈꾸지 않으면서인 거 같다. 햇살이 찰랑찰랑 들어오는 내 보금자리에서

내 소소한 일상을 꺼내거나 내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면서

뒹굴뒹굴하는 데 내 삶이 그냥 주저앉아버린 데도 이유가 있을 거 같다.

 

그래도 그녀가 보내준 마음만은 저버릴 수 없다. 난 사진을 찍어 글과 함께 올리면서

테두리도 음영도 넣어본다. 고맙다는 전화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밀어내든지 아니면

이 가을 찰랑찰랑한 햇살을 가로질러 한 번 훌훌 떠나든지,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난 친구가 보내준 핀들을 서랍 속에 잘 간수해 놓는다. 그러다가 딱 주인이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줄 수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