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번개가 하늘을 가르고 천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계속해서 번쩍이는 하늘 아래, 요란한 소리에 잠을 설치고 난 뒤, 창밖엔 거세게 내리는 비 소리에 더 잠을 청할수가 없었다.
서울은 그래도 덜했지만, 뉴스 속 광주와 충남의 피해는 참담했다.
요즘은 국지성 호우라는 이름으로, 하늘이 제멋대로 휘젓는듯 하는 일이 잦다.
이제는 일기예보가 하루의 안전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시대다.
얼마전 내가 겪은 여의도에 내렸던 폭우, 불과 두 시간 사이에 지하차도가 통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광경을 보며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비가 많이 오면, 특히 운전 중에는 지하차도를 피해야 한다는 당연하지만 절실한 교훈.
2년 전 오송의 지하차도사고도, 어쩌면 '설마'라는 마음이 부른 참사였을 것이다.
시간당 30mm의 비면 큰 우산을 써도 겨우 발을 옮길 수 있다.
70mm 이상이면 우산도 무용지물, 호우경보의 이름값을 제대로 한다.
하지만 이제는 다행히도, 비가 와도 대부분 집 안에서 지낼 수 있는 생활이다
출퇴근의 의무가 있던 시절에 비하면 사정은 나아졌지만, 그 시절 겪었던 불편과 긴장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
비 이야기로 시작된 생각은 어느새 마음속 오래된 후회가 떠오른다
요즘은 시댁이든 친정이든, 전화 한 통 하는 일도 쉽지 않다.
감정의 거리두기를 하다 보니 그리 되었다
그래도 그 복날이 뭔지 초복을 맞아 시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렸다.
다행히 전화 매너는 좋으신 분이지만, 늘 마음 한구석은 무겁다.
경제적인 뒷받침이 충분했다면, 조금은 덜 복잡했을지도 모를 관계 이다.
시어머니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막내딸이 책임감을 지고 잘하면 좋을 터인데 이제는 내가 관여할 형편도 아니여서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중이다.
왜 재산은 챙겨갈 생각하면서 효도는 엔분의 일도 아닌 자신보다 윗 형제 들이 알아서 더 잘해주길 바랄까
어릴 때부터 받기만 한 자식은 그 생각을 못하게 되는 것인가 보다
더군다나 동복형제도 아닌데도 재산 문제는 핏줄 논리로 가면서 의무와 부양은 그게 아니여서 ㅎㅎ
시가는 남편의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란 생각을 이제는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가 스트레스 받고 하는 것은 들해 지기는 하였다
하지만 친정은 핏줄이라서 그런가 아직도 잘 안된다.
남동생은 그나마 큰일엔 나서주고 올케도 잘하고 있지만 나의 바람은 제일 예뻐하고 엄마를 설득할수 있는 남동생이 엄마를 잘 설득해서, 당신 인생을 당신답게 살도록 도와주었으면 했던 바람을 아직도 못버리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기대도 내려놓을려고 한다
아니 내려놓아야 한다.
여동생은, 이제 완전한 포기다.
사람이 나이 들수록 더 좁아지는 그릇 앞에선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서는 안된다는것을 느끼는 중이다
그래서 생각한다.
내가 가장 걱정 하는일 저러다 엄마가 완전 밥도 못하고 운신도 못하게 되면도 되면 두분다 요양원에 보내야 할 날이 오더라도, 나는 빠지겠다고. 생각한다
요양원 보내기 싫은 자식이 들어와서 살으라고 할 것이다
남동생은 지난번 엄마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퇴원하라고 해서 갈 병원이 없어서 곤란할때 시설좋은 요양병원 밥 잘나오고 재활해주는 병원으로 가자고했더니 절대 못보낸다고 난리였다
요양병원도 요양원으로 착각한것인지
어차피 그녀석은 매일 면회도 안온녀석이 면회 안된다고 그리했던것이다
그래서 올케는 집으로 가자고 하고 ㅎㅎ 그당시 걷지도 못하는 양반을 3층 주택으로 어찌 모시고 갈것이고 뭐 그거야 사설구급차 이용해서 들것 태워서 올라가면 되겠지만 아버지랑 같이 어찌있겠냐해서 겨우 겨우 다른 병원 구해서 한달을 좀더 입원해서 총 두달반의 기간을 요양한덕에 그나마 힘은 없어도 삼층계단을 난간잡고 뒤에서 부축해서 올라가시는 것으로 해서 퇴원하게 된것이다
이제 엄마가 완전 몸저 누움 그때 그녀석이 들어와서 살을려고 하는것인지 이제는 남동생 몫이다
ㅎㅎ그런데 만일 그러면 들어와서 자신의 누나도 보살펴주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인지 그냥 답답할 뿐이다
그래서 날 밀어낸 엄마 말되로 출가외인의 자리에서 그저 밀려난 듯, 시키는 대로 살겠다고. 다짐 또 다짐 중이다
나는, 이만하면 정말 할 만큼 했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뇐다.
외삼촌에게도 부탁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심스러운 거리감 뿐이었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
삼촌도 누나 설득이 쉽지 않고 그리고 관여 안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삼촌에게 ‘죄송해요 삼촌'' 말과 함께, "신경안쓰셔도 되요"
전화로 마음 전하고 마음을 접었다
내가 요즘 생각하는것은 부모의 재산은 제일 마지막까지 효도를 잘할 자식에게 주던지 아님 끝까지 지키고 본인이 지휘 하면서 나중 다 엔분의일로 주는것이 최선이기는 하다
나이 들면 뇌가 굳는다는 말을 요즘 자주 듣는다.
정말 그렇다. 생각의 유연성이 사라져 버리는것이다.
난 출가외인이라도 내치면서 왜 집 고칠 일에는 남편을 찾는 걸까.
나는 출가외인이라 오지 말라면서, 사위는 더 남인데 왜 고생시키는가.
얼마 전에도 남편은 뭔가를 고쳐주고 와서 허리아프다고 계속 병원을 지금도 들락거리는중이다
아무래도 허리 협착증이 온모양이다
맨날 목안좋다고 수시로 정형외과가고 한의원가고 물리치료 받고 하는 사람인데
여름이면 장이 안좋아서 찬물 절대 안마시고 음식도 얼마나 가려먹는지 내가 뭘해주는것이 스트레스 받을 정도다.
이제는 그 아프다는 소리조차 듣기 싫다.
위로받고 싶어서 하는 말이겠지만, 정작 내 마음엔 여유가 없다.
나도 즐거워서 지내는것은 아니다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고자 하는 삶일뿐이다
요즘 자주 드는 후회 하나.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결혼은 안 했을 거란 생각이다.
‘노처녀는 불효’라는 말에 밀려 한 결혼이었고, 그로 인해 감당해야 했던 많은 것들이 아직도 진행중인것이다
왜 아버지는 딸을 수녀로 만들고 싶었음 나보고 가라고 하지 왜 첫딸은 결혼해서 잘살게 하고 싶고
둘째딸은 등떠밀어 수녀원으로 보냈을까
결혼생활보다 더힘든것이 수도자의 생활인데 정말 그릇이 안되는애를 그렇게몰랐을까
결국 여동생 저리 만든것도 부모의 책임이 절반은 있다
이후 직장생활하고 할때 내보내서 독립적으로 살게 했어야 했는데 같이 살것이면 생활비 제대로 받고 책임감을 지어주었음 아마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힘들어지더라도 분가 시키라고 종용도 했었지만 엄마는 결혼안해서 나가서 살면 다 나쁜 남자만 만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이미 철벽같이 믿고 계신다
자신이 죽을때 데려갈 자식도 아니건만 왜그리 어리석었을까
아마도 자신이 죽음 남동생이 누나 책임 져줄 것으로 여겼나 보다
병원에서 그부탁을 올케한테 하는것을 내가 들어서 경악을 했었다
올케하고는견원지간보다 더한 사이인데 자격지심에 본인이 잘못하는것은 모르고 손위 올케 무시 한다고그 리 싫어 하는 것이다
올케라 시어머니 앞에서도 아들 잘못 키웠다고 똑부르러지게 말하는 스타일이다노부모랑 같이 살면서 설거지 해주고 심부름했다고 용돈 받길 원했던 여동생
정말 십원자리하나 생활비 안내고 부모 생일에도 작은 케잌 사는것이 선물이 다였다
그렇게해서 나보다 더 좋은집 가지고 있고 통장에 돈도 빵빵하지만 그 삶이 행복하지도않을것이다
하기는 돈이 아예 없음 더 안좋기는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