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날도 넘게 이어지던 지리한 장마는
폭우를 몰고왔고 물난리도 안겨줬다.
가깝고도 먼 이웃에서 들려오던 크고 작은 비 피해 소식을 접할 때 마다
다행이다..다행이다..참 다행이다....
그러면서 내 직장 내의 비 피해가 적은게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인근 민가들 보다 저지대인 너른 마당에 온 동네의 흙탕물이 한꺼번에 내려 와 범람했다.
온 동네 가정 쓰레기들이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조각배들처럼 마당을 둥~둥~떠 다녔다.
그러다 비가 잦아들고 물이 빠지고 나면 볼품없이 허접한 쓰레기더미가
마당 가장자리를 점령하고....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더니 장마가 그쳤다.
시골길을 아스팔트 포장을 하면서 우리 집 마당이 깊어졌다.
길이 비포장 일 때는 우리 집 마당이 높았었다.
세련 된 아스팔트 포장길이 되면서 우리 집이 낮아졌다.
비만 많이 오면 마당이 깜짝 호수로 변한다.
그 덕분에 낮은 곳에서 한창 이쁘게 피고지던 송엽국이 다 녹아버리고 말았다.
아깝다.
채송화보다 더 오래오래 가을까지 피고지며 화단가를 곱게 물들여주던 꽃인데....
다단계 형식으로 만들어진 높은 꽃밭에는 아직도 송엽국이나 벌개미취가 제철을 맞아
이쁘게 피어있지만 키가 웃 자란 백합이 간들간들...
꼭 가을 코스모스처럼 애처롭다.
함박꽃 그늘에서 어째어째 햇살을 좀 더 보겠다고 키만 키웠나 보다.
이리저리 그 긴 목을 흐느적거리면서도 새하얀 송이를 활짝 피우고 있다.
그 근처에만 지나쳐도 진한 그 향기에 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지난 봄에 두 박스나 옮겨 심었더니 잘 자라줬다.
산나리도 키가 사람보다 더 높이 자라있다.
애기 범부채도 회리바람 모양의 배배 꼬인 다문 꽃잎이 벌어지면서 고운 모습으로
이 여름을 시원하게 수 놓는다.
청보라색과 새하얀 수련도 앞 다투어 피고진다.
하루에 두 세 송이씩.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산만하지도 않게 두 세 송이씩만 피어준다.
흔해서 덜 귀애여길까 봐 은근히 조심하나보다.
아무리 긴 장마 끝에도 이불 말릴 햇살은 비춘다고 했던가?
숨 막히도록 습한 공기가 사람을 물러지게 만들 즈음.
이른 아침부터 매미가 지치지도 않고 3단 고음으로 울어대던 어느 날
말갛고 습하지도 않은 햇살이 나왔다.
그냥 날마다 예사롭게 햇살이 비추는게 아니라 이건 오신거다.
너무나 귀하고 반가운 햇살이....
평소에 공기 좋고 하늘 높고 푸르기로 유명한 한국이었지만
한 달이 가깝도록 장마가 길어지다 보니 그 예사롭던 햇살이 그리움이 될 줄이야....
살아가는 절실한 순간들이 될 줄이야...
연애하는 남자를 이리도 간절하게 기다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안 보면 보고싶고 헤어지면 또 기다려지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긴 장마철에 햇살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뭐든지 녹아지게 만들고
뭐든지 곰팡이가 슬게 만들던 장마.
사랑하는 남편이 근처에만 와도 멀찌감치 물러 나 앉게 되었다.
아마 사람도 움지이지 않고 한 자리에 오래 붙박혀 있었더라면
곰팡이가 슬든지 녹아져 버렸을 것 같다.
한 줄기 햇살이 말갛던 그 어느 날
햇살이 반가워
햇살이 아까워
쌀풀을 되직하게 쒀 여름 모시이불이며 아사면 이불 여름 옷가지 몇을 풀 먹여 널었다.
까슬까슬
이불에는 어쩌면 나무 장작개비 소리까지 날 정도로 빠당빠당한 풀을 먹였다.
바람도 제법 불어줬다.
너풀너풀 날리던 이불이며 옷들이
금방 커다란 통 이불에 통 옷이 되고 만다.
툭툭툭....
덜 마른 이불이랑 옷가지들을 대충 두들겨 손질해서 다시 널었다.
저녁에 손질한 이불이며 옷을 받은 남편이 반색을 했다.
시원하고 몸에도 안 달라붙고 대접받는 느낌이라며 좋아했다.
그래......
내 몸 잠깐 자외선에 노출되면 되는데
여름 이불이랑 옷은 풀을 먹여 줄 걸 그랬다.
행사준비로 바쁘고 고단해서...
행사 중이라서...
밥풀이 없어서...
날씨가 덜 맑아서....
핑곗거리도 참 다양했구나 싶다.
서랍장을 정리하다가 풀 먹일 옷들을 모두 모았다.
구정 뜨개실로 짠 런닝셔츠도 찾아냈다.
행사를 마치고 남은 밥을 푹푹 끓여서 짜주머니에 넣고 주물러 냉장고에 뒀다.
날 맑은 날 언제든 후다닥 풀 먹이면 되도록.
침대 요까지도 된 풀물을 먹여 깔았는데 참 좋다.
거실 돗자리도 삼베로 된 소재라 풀을 먹였다.
잠시 잠깐 쉬는 시간에 삼베 요 위에 누우면 까칠한 감촉에 행복하기까지 하다.
등이 가려울 때 누워서 이리저리 꾸불텅꾸불텅...
요 위를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기어오르면 너무너무 시원하다.
효자손도 서러울 정도로 무색하다.ㅋㅋㅋㅋㅋ
이 여름을 도망도 못가고 750 명씩 연 달아 서너주간을 꽉 차게 수련회 가동을 해야 한다면
최대한 시원하게~
최대한 덜 짜증스럽게~
그리고 최대한 즐기는 마음으로 달리는 거야.
늘 한결같지만 다른 모습으로 내 곁에 오는 소중한 순간들 인 걸....
함께라서 행복한 순간들 인 걸....
이 여름도 두 번은 없을 시간들인데.
20대의 몸매에 늙지도 않는다는 지난 여름의 그 손님이
올해도 몇년 째 같이 또 하는 새하얀 거짓말에
뻥이요~~~~
쌀튀밥 같은 폭발적인 웃음으로 답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