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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癌)... 인생(4)] 형의 도시락...


BY KC 2010-11-08

 

형이 근무하던 시청은 집에서 약 30여분을 걸어가는 곳에 소재하고 있었다. 로터리로 향하는 언덕길이 시작되는 곳에 서있던 시청은 그 위용이 대단하였다. 커다란 본관과 그 본관에서 좀 떨어져 기역자로 놓여진 별관으로 구성된 시청은 일반인들에게는 범접하기 어려운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내게는 시청이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 아니었다. 거의 매일 형의 점심을 내가 배달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저학년일 때 우리 학교는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였다. 내가 오전반일 경우에는 학교를 파하고 난 후, 오후반일 때는 학교 가는 길에 조금 일찍 집을 나서 큰 누나가 싸준 형의 도시락을 들고 30여분을 걸어 시청 토목계로 배달을 다녔다. 형과 나는 생김새가 매우 닮았었고, 형은 제법 일 잘하는 젊은 직원으로 알려져서인지 내가 시청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OOO 동생이지? 아주 똘똘하게 생겼네.라고 아는 척을 해 주었다. 나는 사람들의 그런 머리 쓰다듬기가 나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형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는 내게 하나의 동기부여 역할을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결코 가볍지 않은 도시락을 들고 30여분이나 걸어가는 일이 싫지 않았던 다른 큰 이유는 바로 즉각적인 보상 때문이었다. 형은 내가 도시락을 전달 할 때마다 거의 예외없이 얼마간의 적은 돈을 심부름값으로 건네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작은 과자봉지 하나 정도 사 먹을 정도의 아주 적은 금액이었지만 그 돈을 받는 재미는 매우 쏠쏠하였다. 그래서 어떤 날 내 바로 위의 형이 도시락 배달을 갈 때면 나는 몇 시간 동안 우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형에게 도시락을 전달하면 내 역할은 끝이 났고 빈 도시락은 형이 퇴근할 때 들고 돌아왔다. 형이 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한 번도 그 이유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형이 내 고등학교 시절 돈 씀씀이에 대해 훈계를 할 때 점심값을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오전반, 오후반으로 교차되어 학교를 다니던 저학년 때에는 내가 형의 도시락을 전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어 나도 도시락을 싸들고 오후까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 하던 때부터는 형의 도시락을 전달할 수가 없었다. 이즈음에 형은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하였다. 핸들바 부분은 스텡으로, 핸들은 까만색으로 되어 있었고, 연료 탱크는 약간 빛이 바랜 빨란색으로 되어 있었고, 그 뒤로는 까만 가죽색의 2인용 의자가 놓여있던 오토바이였다. 브랜드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비까번쩍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중고였을 것이다. 아무튼 형은 점심때가 되면 그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까지 와서 점심을 먹고 가곤 하였다. 학교가 쉬는 날, 혹은 일찍 하교를 하는 날 형이 점심을 먹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오면 나는 골목 앞에 서있는 그 오토바이에 앉아 잘 잡히지 않는 핸들에 손을 뻗어 잡고 마치 드라이브하는 듯한 폼을 잡곤 하였다. 커다란 헬멧을 쓰고 형의 커다란 선글라스까지 끼고 나면 나는 마치 미국 드라마에서나 봄직한 오토바이 경찰이 넓다란 미국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면서 맞는 바람의 상쾌함을 느끼곤 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멋있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동네에는 형 것과 같은 오토바이를 가진 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형의 점심시간 동안 서있는 형의 오토바이를 타는 시간에 나는 동네 친구들의 시샘을 한 몸에 받았고 실제로 주말이 되어 가끔 형이 나를 뒤에 태우고 어딘가를 가기라도 하게 되면 동네 아이들의 부러운 눈초리는 내 뒷통수에 무한히 꽂히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이다음에 커서 공무원이 되어야겠다고. 형보다 좋은 근사한 오토바이를 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하지만 겉으로는 한 번도 공무원이 장래 희망이라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형은 내게 늘 판검사가 되어 영감님 소리를 들어야 한다라고 반 강제적으로 내 꿈을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둘째 형이 점심값을 아껴 가면서 가계의 중심에 서 있는 동안 큰형의 장사와 자전거 배달은 가계에 크나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우선 계절별로 들쭉날쭉이었고, 호사스럽지 않았지만 형의 잦은 음주는 우리에게는 적지 않은 비용이 지출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벌어오는 존재가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차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둘째가 가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유교에 얽매여 있던 어머니에게 장남의 존재는 커다란 자리매김이었다. 그런데 그런 큰 형이 나이 22살의 겨울에 군대 징집 영장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살던 곳에서 버스로 약 2시간을 가야 하던 곳으로 입영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둘째 형 그리고 내가 그 곳까지 몇 번의 버스를 갈아타고 배웅을 하였다. 큰형이 입대하는 날 지금껏 기억나는 세가지는 첫번째는 큰 형과 같은 훈련병들에게 소리내어 시키던 우스운 지시였다. 앞 사람 머리잡고 앉아, 앞 사람 머리 잡고 일어나…” 그러면 똑 같이 따라 하면서 그 행동을 반복하던 것과 내가 왜 이럴까? 어제는 안 그랬는데. 오늘은 왜 이럴까? 아마도 조상 탓이겠지.라는 반복된 추운 날의 구호였다.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우스운 운율과 우스운 내용 때문이리라. 아무튼 그렇게 내게는 우스운 형국에서도 어머니와 둘째형은 꽤 서럽게 울던 모습이 내가 가진 두번째 기억이다. 그리고 마지막 기억은 왜 그랬는지 몰라도 버스로 약 두어 시간 가던 배웅의 거리를 올 때에는 택시로 단박에 왔다는 것 그리고 그 택시에서 나는 멀미를 하여 온통 구토를 하였다는 것이다.

 

형을 그렇게 군대로 보내고 얼마 동안 어머니는 자주 우리에게 눈물을 보이셨다. 포천 어디로 배치받았다는 큰 형에 대한 안타까움과 큰 형의 역할까지 떠맡아 고생하는 둘째형 및 자신이 맡은 더 한 고생스러움이 눈물로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상황이 우리 가족을 덮친 것은 큰 형이 입대하하고 약 1 8개월 정도 지난 때였다. 그것은 둘째 형의 입대 영장이었다. 집안의 가장을 앗아간다는 것 이상의 큰 충격이었다. 형의 입대 소식은 온 가족의 저녁식사 이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내 생애 그 전까지 온 가족이 그렇게 서럽게 울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마치 그 저녁은 하늘이 무너진 듯한 기운이 우리 모두를 집어 삼키고 있었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