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중국음식을 맛본 건 초등학생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반(班)에서 시험을 봤다손 치면 그야말로 ‘무조건’
1등을 하던 쾌도난마(快刀亂麻)의 가히 무풍질주(無風 疾走)의 호시절이었다.
어느 아버지든 마찬가지겠으되 나의 아버지 역시
‘초기’엔 그처럼 공부 잘 하는 나를 퍽이나 예뻐해 주셨다.
한데 그 때는 다들 못 살았던 1960년대였으므로
중국음식을 먹자면 천안역 앞과 그 일원의 번화가로 나가야 했다.
이윽고 들어선 화려한 빨간 깃발과 장식품 일색의
중국집은 이 촌놈의 맘을 쿵쾅쿵쾅 뛰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뭘 해 드릴깝쑈? 쏼라쏼라...”
“우리 아들 뭐 먹을래?”
“짜장면요!”
당시에 나와 같은 시골 촌놈의 입에
자장면처럼 세상에서 가장 맛난 음식은 감히 없었다.
세월은 여류하여 나도 나이를 먹고 자녀를 낳았으며
중국음식 또한 예전의 자장면 일색에서 더욱 발전했다.
짬뽕과 울면, 그리고 볶음밥과 잡채밥도 모자라 이따금은
탕수육까지를 시켜 먹는 무모함(?)도 보였으니 말이다.
말끝마다 버릇처럼 “웃기는 짬뽕”이라느니
“웃기는 짬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라는 이가 있다.
그는 또한 울고 싶을 땐 울면을 먹어야 한다는 조크 역시 남발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런 그에게 맞장구를 쳐 주고자
“그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요’ 라는
캐롤송처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대신에
울면을 주겠네?”라고 응수하여 그를 뒤집어지게 하기도 했다.
오늘은 모처럼 장맛비가 푸짐하게 내렸다.
그러자 한동안 괴롭혔던 무더위가 달아나면서 점심의 입맛 또한 짬뽕이 불현듯 그리웠다.
“오늘 점심은 중국집으로 갑시다!”
드디어 식탁에 오른 해물짬뽕!
푸짐한 홍합에 조개까지 수북한 걸 보자니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포만감이 들었다.
더욱이 어제의 과음으로 말미암아 그때까지도 속이 거북하였던 터였기에
짬뽕의 시원한 맛은 속까지 일거에 풀어주는 일종의 해장국 역할까지 하여 금상첨화였다.
다시금 팔불출의 전형을 보인다고 흉을 볼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진실의 규명’ 차원에서 구태여 반복하는데
이제는 다 자란 아들과 딸도 공부를 꽤나 잘 했다.
두 아이가 받아온 상장들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클리어 파일 두 개 분량만큼이나 되니 말 다 했다.
아이들이 마치 경쟁적으로 그같이 상장을
받아오면 나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했다.
예컨대 자장면 내지 탕수육 따위를 사 주는 것이 바로 그런 행위였다.
‘가장’이라는 완장을 찬 지도 어언 30년이 가까워 온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여 한달치 월급을 받아와도,
아니면 최근의 경우처럼 수필가로 등단을 했다고 해도
가족 중 누구 하나 나서서 ‘짜장면’이 되었든
짬뽕 내지 술 한 잔조차 사 주는 이가 없는 그야말로 ‘더러운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아쉬운 놈이 샘(泉) 판다’고 내 돈 내고 술이든 짬뽕이든 간에 사 먹는 수밖에는.
어제의 음주도 실은 내 돈 내고 사 먹는 술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물론이다.
근데 모르겠다.
조만간 휴가를 맞아 집에 올 예정인 아들이 사 줄는지는.
속담에 ‘부모는 열(十) 자식을 모두 걱정하지만
열 자식은 한 부모조차 제대로 봉양하지 못 한다’는 게 있다.
이런 걸 보면 너무도 일찍 타계하신 아버님이 그립다.
지금껏 생존하셨더라면 필경 수필가로 등단했다는 낭보를
듣던 날에 당장 “얼른 나가자! 이 아비가 술 한 잔 내마.”라고 하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