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부분에서 아는 게 별로 없는 무지렁이다.
하여 역사라는 것도 책과 기타 지식의 샘(泉)을
이용하여 보고 배우지 않으면 사실상 청맹과니인 게 사실이다.
그렇긴 하더라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래서 현재도 책과 인터넷, 그리고 사이버대학을
매개와 빌미로 하여 부족한 지식의 창고를 메워가는 중이다.
여하튼 이같이 무지(無知)한 필자의 시각에서 역사학적 관점으로
백제를 보자면 솔직히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다는 의자왕과 백제 왕조를
지키고자 장렬히 최후를 마친 계백장군 외는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드물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백제는 결코(!) ‘만만한’ 국가가 아니었다.
백제는 B.C. 18년에서 A.D. 660년까지 한반도
남서부 지역을 점유하고 있던 대단한 국가였으니 말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신라와 함께 한반도에서 당당히 그 자신의 실체를
인정받았고 능산리 고분에서 출토된 백제금동향로에서도
익히 알 수 있듯 문화적으로도 뛰어나게 앞서가던 국가가 바로 백제였다.
또한 일본에 대해서도 각종의 찬란한 문화를 얼추 무한정으로
수혜(受惠)해 주었고 일본 고대국가 성립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나라가 바로 백제였음은 구태여의 사족이겠다.
하여간 이처럼 대단했던 국가 백제의 존재 시절에 그동안 알려졌던
붓 뚜껑의 ‘문익점 목화’보다 800년이나 앞선 백제시대 면직물이
발견되었다는 오늘의 뉴스는 모든 언론에 도배되는 일종의 충격파였다.
초등학교 때 배운 역사상식에 따르면 그동안 목화는
고려 말의 문신 문익점이 1363년에 목화씨를 ‘몰래’ 반입한
덕분으로 시작됐다는 것이 얼추 정설이었다.
하지만 백제시대엔 이보다 800년이나 빠르게 면직의
역사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고 하니 새삼 백제의
그 융성했던 중흥기가 눈앞에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려졌다.
지금도 시집을 앞둔 처자에게 어머니가
“우리 딸에게 목화솜 해 줘야겠네!”라는 말을 하는 이가 없지 않다.
한데 이는 ‘꽃은 목화가 제일이다.’라고 한 속담에서 보듯
두툼한 목화솜으로 만든 이불은 부부간의 정을 더욱 도탑게 할 것이란
어머니 특유의 바람이 바로 그같은 비유적 발언으로 표출된 것 아닐까?
오는 9월 18일부터 10월 17일까지 백제의 고도였던
충남 공주와 부여 일원에서는 <2010 세계대백제전>이 성대하게 열린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에서도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쇄도할 것이라 예견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바라건대 이 축제를 계기로
여전히 우리 땅 독도를 가지고 우기는 일본인들이
특히 더 많이 이 행사장을 찾았음 하는 것이다.
그리곤 무려(!) A.D. 600년 시절에 목화씨를 재배한 국가였으며
또한 자신의 나라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국가가 바로 백제였노라는 새로운, 그러나 엄연한 역사적
교훈까지를 부수적으로 배워갔으면 하는 희망사항이 덩달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