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서 친구랑 싸우지 말고. 부모님 오라 가라 하면 아빠 속상해. 알았지?
그리고 반장 같은 거 시켜줘도 절대 하지 말고 아빠 요새 돈 없어.
공부 끝나면 놀지 말고 곧장 집으로 오구……”
학교 갈 시간이 30분이나 남았는데, 미리 가서 수업 준비해 놓고 선생님 기다리라며
삼겹살 세 줄, 왕새우 다섯 마리 구워서 요쿠르트에 딸기 갈아 먹이더니
내 손에 1달러 쥐어주며 타이르는 남편의 태도가 진짜 같아서 둘이 낄낄대며 웃었다.
“자기…나 오늘 학교 쨀래~”
짼다는 건, ‘땡땡이’ 곧 결석하겠다는 요즘 아이들 은어다.
“안돼! 학생이 결석하는 건 무조건 안돼”
“아이 시러! 오늘은 공부 안하고 트립(현장학습) 나가는 날이라서 괜찮아”
“현장학습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니까 얼른 다녀 와….. 아빠가 돈 많이 벌어놓고 있으께”
\"아~~~ 씨! 나 야간학교 다니기 싫어. 야간학생은 공부 못하는 애들만 다니는 줄 알아\"
\"그래 그래 다음 학기는 꼭 주간 보내주께\"
ㅋㅋㅋ
시작은 장난이었는데 말을 하고 나니 진짜 학교 가기가 싫다.
밥 먹고 나니 졸음도 사르르 오고.....
초등학교 시절
방학 일주일 전부터 학교 앞 만화방에서 만화책
50여권 족히 빌려 보조책가방 속에 넣어 와
아버지와 오빠 눈 피해 다락방에 감춰놓고
아침 밥 먹기 무섭게 다락방에 박혀 웬종일 쪽창 앞에서 엎드려 읽고 나면
저녁 밥 알이 글자로 보일 지경이었다.
보름이면 빌려 온 책들이 바닥나고, 새마을부녀회장인 엄마에게 배달되어 오던
\'가정의 벗\'이니 \'새 농민\'이니 잡지를 읽으면 피임법, 콘돔 사용법 등
농촌계몽이 한창이던 당시 주요 내용이 \'딸 아들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이런 거였다.
가족계획에 대한 이때 얻은 지식이 평생 가고 있다.
그마저 끝나면 동네 순례를 나섰다.
22가구가 같은 성씨를 가진 집성촌이고 보니
모두가 친척이며 가족 같이 살던 곳이라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어가 책을 읽고 있어도 뭐라 할 사람도 없고
오히려 때 되면 밥 주고 말린 감 껍질이나 항아리에 감춰 둔 강정에
골고루 얻어 먹을 수 있어, 꿩 먹고 알 먹고 깃털로 부채 만드는 격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재미있는 책’
내가 이해 할 수 없는 책은 ‘재미없는 책’으로 분류 될 뿐
좋은 책 나쁜 책에 대한 기준도 없었다.
온 동네 집에 굴러다니는 책이라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던 초딩은
당시 고딩에게도 금서였던
중딩 시절 의미도 모르던 헤르만 헤세의 시타르타와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죄와 벌 등등 ...대학생 오빠의 책까지 책들까지 싹쓸이를 했다.
방학 숙제는 단 한 줄 할 시간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하고 싶지 않은 거였지만
정신이 몽롱하도록 책만 읽다가 개학 하루 앞두고 벼락을 쳤다.
그때는 왜 그렇게 일기에 날씨를 표시하게 했을까.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일기장마다 무조건 날씨를 그려넣도록 되어 있었다.
날짜를 뒤집어, 햇살을 조명삼아 책을 보던 다락방의 쪽창에 비치던 밝기를 떠올리며
빗소리를 들었는가 햇빛이 눈부셨던가...
아버지가 과자를 사다 준 날, 엄마가 술빵을 만들어 주던 날, 오빠에게 손톱 검사받던 날 ….
온갖 기억이 총동원됐다.
엄마 아버지는 잘 먹고 잘 놀기만 하면 성적에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문제는 개학날이다.
숙제를 안했으니 학교 가는 게 도살장 끌려 가는 것처럼 발걸음이 무겁고
차라리 배라도 아파주면 좋겠구만, 쉰 음식을 먹어도 배탈 한 번 나질 않고
발가벗고 찬물에 목욕해도 감기 한번 걸리지 않는 건강체질에 불가한 일이었고
차라리 전쟁이 나서 학교가 홀랑 타버렸으면 좋겠다는 가당치도 않은 상상을 하며
아이 걸음으로 50분을 가야 하는 거리를 1시간, 1시간10분... 늘이다가
빈 폐가에 들어가 아이들을 꼬드겨 땡땡이를 주도했다.
학교 다녀 온 척 , 태연히 집으로 돌아와 놀고 있는데
동학년 5촌이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아픈가 해서 찾아오는 바람에 들통이 났다.
휴, 그날 아찔하게 맞았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던 엄마는
동네 아이 절반을 결석하게 만든 주모자가 딸이라는 걸 알고
부러진 회초리를 다시 꺾어 올 시간도 아까워
빗자루 몽댕이로 잔인하리만치 많이 때렸다.
동네가 모두 친척이니 완전범죄를 꿈꾸던 우리의 집단 땡땡이는
금세 부모님들 귀에 들어가 집집마다 피터지게 맞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그날 온 동네가 곡소리 요란했다.
벌써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오래 오래 오래 전 일이다.
그날처럼 방학 숙제도 없는데 학교 가기 무지 싫은 오늘
남편 몰래 땡땡이를 치고 늦은 밤 자수해서
그날 엄마한테 맞았던 것처럼 남편에게 온 몸을 죽도록 맞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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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로…….